제발 우리 공부하게 해 주세요.
토론 위주로 진행되는 살아있는 수업을 만들어야.
아이들이 공부를 그토록 싫어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재미없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하라고 하면 더 하기 싫어한다. 영원한 숙제다.
그렇다면 공부를 좋아하게 만들면 되지 않을까? 가장 바람직한 경우는 공부가 미치도록 재미있고, 어른들이 제발 하지 말라고 사정하는 것(실제로 내 친구는 아들이 공부를 너무 좋아하는 데다 내 친구는 밤에 일찍 자라고 잔소리를 한다. 그러면 아들은 엄마가 못 들어오게 방문을 꼭 꼭 걸어 잠그고 몰래 공부한다.)
이렇게 아이들이 공부를 재미있어하려면 교사, 학부모, 게임 제작자들, 방송 관계자들의 협조가 좀 필요하다.
즉 게임을 재미없게 만들든가 19세 이전까진 못 보게 심하게 야하거나 폭력적으로 만들어 어른들의 전유물이 되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요즘 나오는 게임들은 예술적, 역사적, 미술적인 명작들이 많다. 그래서 그 핑계로 당당히 밤새서 게임하는 우리 아들 같은 경우가 생긴다.
“엄마 이 게임은 미국 서부개척시대의 역사를 알 수 있는 게임이에요. 한판을 다 깨야 그 당시 미국 역사를 제대로 알 수 있다고요.”
어떤 날은
“엄마 이 게임 좀 보세요. 그래픽 효과가 예술이지 않아요? 그런데 이게 2000년도 판이에요. 그때부터 이렇게 잘 만들었다고요.”
이쯤 되면 나도 아들의 상술에 휘말려 게임의 장점에 푹 빠져서 신제품을 사준다. 참 아이러니하다. 공부는 재미없게 만들고 게임은 재미있게 만든다고? 만약 게임에 한국 역사부터 수학 방정식 개념을 넣어 만들면 어떨까?
그러면 적어도 공부에 도움이 될 텐데. 그리고 공부 내용은 재밌고 감질나게 만드는 거다.
예를 들어 일상생활에서 자주 일어나는 일화 중 손해가 나거나 이득이 발생하는 일, 즉 목적이 분명한 학습과제로 교과서를 만드는 거다.
그리고 수업도 놀이처럼 재밌는 콘셉트로 진행하는 것이다. 그러면 하지 말라고 해도 수업에 집중할 텐데.
오래전 초등학교 미술시간에 색상에 대해서 배운 적이 있다. 먼저 명도를 배우면서 흰색부터 검은색까지 그러데이션이 나타나게 10단계로 색칠하는 것이었다.
그 10칸 간격에 맞게 선을 그어야 했고, 붓으로 색칠할 땐 선을 넘지 않게 예쁘게 칠해야 했다.
나는 그 수업이 너무 지겨웠다. 선을 넘게 칠하면 선생님께 혼났기 때문이다.
그런 과정에서 미적인 감성을 키운다던가 창의력을 키운다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나는 요즘 미술을 가르칠 때마다 그때의 한을 푼다.
예를 들어 자연과 색이란 단원을 가르칠 땐 자연에 어떤 색이 있나 알아보러 운동장에 나간다.
아이들에게 자연색을 핸드폰으로 찍어 오라고 한다. 그리고 그 색을 한번 만들어 보라고 한다.
그러면 그 색에 이름을 붙여주고 색 발명가라고 칭찬해준다. 그런 과정에서 평소 알지 못한 아이들의 재능이 발견된다.
우리 반에 폭력적인 남자아이가 있었다. 그런데 그 아이가 만들어낸 색들은 파스텔 톤 일색인 것이다. 꽃을 보고 만든 색은 그해 유행색인 로즈 쿼츠 색 그 자체였다.
“이런 멋진 색을 만들어 내다니.”
하면서 칭찬해 주면 그 아이는 우쭐해서 더 멋진 색을 만들어내는데 몰두한다.
그런 과정이 다소 소란스럽기도 하지만 아이들은 즐거워 어쩔 줄 모른다.
마치 자신들이 예술가 내지는 발명가가 된 듯한 착각에 빠지니 말이다.
문제는 옆 반 선생님이었다.
“왜 그 반은 늘 그렇게 시끄럽죠? 그래서 우리 수업시간에 아예 문 닫고 수업했어요.”
그럼 나도 지지 않고 대답한다.
“미술시간이었어요. 선생님 반은 ‘자연과 색’ 단원 가르칠 때 무슨 활동하셨어요?”
그러면 아주 승리자 같은 표정의 선생님. 이렇게 대답하신다.
“음, 일단 제가 삼원색, 명도, 채도 등에 대해 20분 정도 ppt 보여주면서 설명하였고요. 그다음엔 아이들에게 원을 그리라고 하고, 삼원색 분할해서 칠하라고 했어요. 그리고 검은색부터 흰색까지 10단계 만들고 칠하라고 했어요. 그랬더니 계속 조용하던데요?”
맙소사! 무려 40년 전에 내가 치를 떨었던 그 수업, 그 수업의 망령이 되살아나다니.
‘선생님. 너무 하셨어요. 그런 수업은 죽이는 수업이라고요, 창의력을요.’
하고 혼잣말을 한다.
아이들이 재미있어하는 수업을 하면 시끌벅적하다가 조용하다가 한다. 소릴 질렀다가 빵 터지는 웃음이 나오다가 온갖 형태의 소음이 리드미컬하게 흐른다.
그런데 군대 조교 같은 교사가 지도하는 교실을 보면 늘 패턴이 같다. 교실이 조용하면 학생들이 집중하는 줄 아는 경향이 있다.
교사가 일방적으로 주입식 교육을 하는 경우인데 말이다.
그런 경우 학생들은 할 일이 없다. 그저 조용히 앉아 수동적으로 듣는 수밖에.
그런 교실의 풍경을 보자. 아침 1교시부터 6교시까지 아이들 소리는 하나도 안 들리고, 교사 혼자 일정한 톤의 딱딱한 말투로 수업을 한다.
그러면 여기저기 조는 아이, 짝이랑 장난치는 아이 등이 발생한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밖에서 들어보면 조용해서 절간 같은 교실이 된다.
조용한 교실에서 아이들이 신음하고 있다. 방식을 바꾸면 재밌어서 못 견딜 만한 공부도 많은데 말이다.
수업시간에 친구랑 떠들거나 교사의 설명에 자꾸 끼어드는 아이들 때문에 생기는 소음은 제지해야 한다.
하지만 수업에 몰입하면서 적극적으로 의견을 내고 토론하는 교실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그래서
“노는 것보다 공부가 더 재밌었어요. 그러니 제발 우리 공부하게 해 주세요. ”
라고 말하는 교실을 꿈꾸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