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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속에 담긴 그릇

황희 정승이 보여준 사람의 마음을 읽는 지혜

by 김형범

길을 가다 보면 참 많은 말을 듣게 됩니다. 누가 옳다, 그르다, 이건 맞고 저건 틀리다는 이야기들이 하루에도 몇 번씩 오갑니다. 어떤 말은 날카롭게 가슴에 박히고, 어떤 말은 그냥 흘러가 버립니다. 그런데 가끔, 단 한 마디의 말이 오래 남는 경우가 있습니다. 말의 무게가 달라서라기보다, 그 말 뒤에 담긴 마음의 깊이 때문입니다.


조선 시대의 명재상 황희 정승에게는 그런 말의 지혜가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잘 알려진 민담이지만, 들을수록 더 많은 걸 생각하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황희 정승이 어느 날 집에 있을 때, 한 마을 사람이 찾아와 말합니다. “올해 제사를 지내야 하는데, 마침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하지만 저는 제사를 지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아이의 복이 중요하다 해도, 부모님에 대한 도리는 지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황희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합니다. “그래, 자네 말이 맞네.”


다음 날, 또 다른 사람이 황희를 찾아옵니다. 그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냅니다. “올해 저희도 제사를 지내야 하는데요, 그날 강아지가 태어나서요. 이번엔 제사를 생략하려고 합니다.” 황희는 그에게도 똑같이 말합니다. “그래, 자네 말도 맞네.”


이 모습을 지켜본 부인이 묻습니다. “같은 상황인데 어째서 두 사람 말이 모두 맞다고 하시나요?” 황희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합니다. “그래, 부인 말도 맞구려.”


이 이야기만 놓고 보면 얼핏 우스운 해학처럼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만히 들여다보면,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본 황희 정승의 깊은 통찰이 담겨 있습니다. 두 사람 모두 제사를 지낼지 말지를 고민하며 찾아왔지만, 이미 마음속엔 각자의 결정을 내려둔 채였습니다. 한 사람은 아이가 태어났음에도 조상에 대한 예를 먼저 생각했고, 다른 사람은 강아지가 태어난 일을 이유 삼아 제사를 생략하려 했습니다. 상황은 비슷했지만, 그 속에 담긴 마음의 무게는 분명 달랐습니다.


황희 정승은 그 차이를 지적하거나 평가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사람들의 판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그 판단 뒤에 숨어 있는 사정, 감정, 삶의 무게를 함께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말의 옳고 그름보다, 그 말을 하는 사람의 마음을 읽어주는 것. 그것이 황희 정승이 보여준 진짜 지혜였습니다.


우리는 흔히 누가 맞고 누가 틀렸는지를 판단하는 데 익숙합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처럼, 같은 말에도 그 말을 꺼낸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다른지 들여다보는 눈을 가질 수 있다면, 세상을 대하는 태도도 조금은 달라질 수 있을 것입니다. 결국 말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말에 담긴 마음의 크기가 사람을 드러냅니다.


황희 정승은 판단을 내리지 않았지만, 그로 인해 오히려 사람들의 그릇이 자연스럽게 드러났습니다. 말이란 그렇게, 마음을 비추는 거울일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 거울을 정직하게 바라볼 수 있는 사람만이, 진짜로 사람을 이해하는 사람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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