욱일기를 용인하는 서구의 이중 기준
전쟁은 총이 멈추고 나서도 완전히 끝나지 않습니다. 총성이 멎은 자리에는 인간의 몸보다 더 깊은 기억과 상징이 남습니다. 그리고 그 기억을 어떻게 다루고, 어떤 상징을 지우는지는 단순한 문화적 선택이 아니라, 국가의 윤리와 태도, 그리고 정치적 의지를 드러내는 일이 됩니다.
독일의 나치기는 오늘날 유럽 사회에서 가장 금기시되는 상징입니다. 하켄크로이츠, 즉 ‘스와스티카(卍)’는 현재도 유럽 대부분의 나라에서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으며, 전시나 소지 자체가 처벌 대상이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독일에서는 만화나 게임, 영화 속에서도 이 문양의 사용을 엄격히 제한하고 있습니다. 이는 단지 이미지 하나를 규제하는 것이 아니라, 독일 사회가 나치 과거를 기억하고 반성하려는 태도를 제도적으로 드러낸 결과입니다.
반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제국주의를 상징했던 욱일기는 현재도 별다른 제약 없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일본 해상자위대는 욱일기를 공식 군기로 사용하고 있으며, 일본의 축구 응원단이나 상업 디자인, 패션 브랜드에서도 종종 이 문양을 볼 수 있습니다. 일본 정부는 욱일기가 “오랜 전통 문양”이라 주장하며, 그 정치적 의미를 축소하려 합니다. 그리고 많은 서구 국가들 역시 이에 대해 별다른 문제 제기를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시아 여러 나라, 특히 한국, 중국, 필리핀 등에서 욱일기는 단지 ‘문양’이 아니라, 침략과 학살, 식민지 지배의 공포를 상기시키는 전범의 상징입니다. 조선에서 수탈이 일어나고, 난징에서 대학살이 벌어지고, 위안부와 강제징용의 현장에서 수많은 고통이 존재하던 바로 그 순간, 욱일기는 항상 함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서구 사회는 욱일기에 대해서는 침묵할까요?
첫째는 기억의 서열화 때문입니다. 유럽 중심의 역사 인식에서, 유럽 내에서 벌어진 전쟁범죄는 ‘문명의 붕괴’로 간주되었고, 나치의 유대인 학살은 인류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보편적 교훈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그러나 아시아에서 일본이 자행한 전쟁범죄는 ‘타자에게 가해진 타자의 고통’으로 간주되었고, 그만큼 진지하게 다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이는 곧 아시아인의 고통이 서구의 역사 기억에서 주변화되었음을 의미합니다.
둘째는 국제 정치적 이해관계입니다. 전후 냉전 체제 속에서 일본은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상 가장 중요한 반공 거점으로 활용되었습니다. 미국은 일본의 전쟁 책임을 철저히 묻기보다는, 천황제를 유지시키고 A급 전범들을 빠르게 정치·경제계로 복귀시키는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이로 인해 일본은 과거를 반성하지 않아도 되는 구조 속에서 성장할 수 있었고, 서구는 이를 묵인하였습니다.
셋째는 서구 내부의 무지와 무관심입니다. 유럽과 북미의 시민들 대부분은 욱일기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지 못합니다. 그 문양이 난징, 서울, 마닐라에서 어떤 공포의 상징이었는지 교육받은 적도, 들은 적도 없기 때문입니다. 나치의 깃발은 수많은 영화와 다큐멘터리, 문학 작품으로 기억되었지만, 욱일기의 역사적 맥락은 국제 미디어나 교육 시스템에서 철저히 비가시화되어 있었습니다.
결국, 스와스티카는 전 세계가 금기시하면서도, 욱일기는 여전히 허용되는 현실은 단지 문화적 관용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세계가 어떤 고통은 기억할 가치가 있다고 여기고, 어떤 고통은 침묵해도 된다고 판단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는 기억의 위계이자, 윤리의 이중 기준입니다.
사진 속 나치기와 욱일기가 나란히 걸려 있던 시절은, 두 깃발이 모두 전범의 상징으로 사용되던 때였습니다. 그런데 왜 지금은 하나만 비난받고, 다른 하나는 살아남아 세계 곳곳에서 사용되고 있을까요? 그 물음은 일본의 문제뿐만 아니라, 그 침묵을 용인한 국제사회의 책임까지 함께 돌아보게 만듭니다.
기억은 선택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선택적 기억은 언제나 또 다른 폭력을 준비하게 만드는 뿌리가 됩니다. 욱일기를 비판하지 않는 세계는, 사실상 아직도 과거의 고통을 계량하고 서열화하며, 국제 정치적 이해에 따라 기억을 관리하고 있다는 점에서 윤리적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이렇게 물어야 합니다.
왜 어떤 깃발에는 분노하면서, 어떤 깃발에는 침묵하는가.
그 질문에 대한 대답 속에, 우리가 지금까지 누구의 고통을 들었고, 누구의 고통은 외면해왔는지에 대한 진실이 담겨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