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츠담 회담, 윤봉길 의거, 그리고 한반도의 의지
1945년, 세계는 거대한 전쟁의 종말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일본 제국의 패전이 눈앞에 다가왔을 무렵, 전후 세계 질서를 새롭게 정립하고자 하는 열강들의 논의가 펼쳐졌습니다. 그중 하나가 바로 포츠담 회담이었습니다. 이 회담은 단순히 일본에 대한 항복 조건을 명시하는 자리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전후 아시아가 어떤 구조로 재편될 것인가를 결정짓는 회담이기도 했습니다.
오늘날 많은 역사 교과서에서는 “포츠담 선언에서 한반도의 독립이 명문화되었다”는 단 한 줄로 이 사실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한 줄 뒤에는, 결코 단순하지 않았던 복잡한 외교적 역학과, 무엇보다 우리 민족 스스로의 독립 열망과 행동의 기억이 깊게 깔려 있습니다.
포츠담 회담에서 한반도의 독립이 논의될 수 있었던 데에는, 중국의 장제스라는 인물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그는 회담에서 조선의 독립 필요성을 강하게 주장했고, 이는 단순한 외교적 제스처가 아니었습니다. 장제스는 이미 오래전부터 조선의 독립운동가들과의 교류와 연대 속에서 그 열망을 직접 체감해온 인물이었습니다.
그에게 특히 깊은 인상을 남겼던 사건은 바로 1932년 윤봉길 의사의 상하이 홍커우 공원 의거였습니다. 이 사건은 단지 일본군 장교 몇 명을 제거한 폭력 행위가 아니라, 조선이라는 나라가 아직 살아 있다는 사실, 그 나라의 젊은이들이 조국을 되찾고자 세계의 심장부에서 몸을 던지고 있다는 사실을 국제사회에 각인시킨 강렬한 선언이었습니다.
장제스는 그 기억을 품고 있었고, 그 기억 덕분에 포츠담의 테이블 위에서 한반도의 독립을 의제로 올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의견은 회담 참가국 모두에게 환영받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특히 영국은 한반도의 독립에 대해 반대 입장을 보였습니다. 당시 전 세계에 걸쳐 식민지를 보유하고 있던 영국 입장에서, 조선의 독립은 단순히 하나의 지역 문제를 넘어 전 세계 제국주의 체제의 균열을 예고하는 불편한 선례였기 때문입니다. 한반도가 독립한다면, 인도나 버마, 말레이 같은 식민지에서도 같은 요구가 일어날 수 있다는 두려움이 영국의 입장을 결정지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반도의 독립은 포츠담 선언에 명문화되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단지 강대국 간의 타협의 결과로만 보아서는 안 됩니다. 그 독립은 조선 민중의 끈질긴 독립 의지와, 행동으로 보여준 희생과 투쟁의 결실이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독립하고자 했습니다.
그 의지는 망명 정부를 세웠고, 광복군을 조직했으며, 해외에서의 투쟁을 이어갔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열망이 국제사회에 기억되었고, 강대국의 회담장 안에서 ‘조선을 독립시켜야 한다’는 목소리로 되살아났던 것입니다.
비슷한 시기에, 일본의 또 다른 변방인 오키나와는 전혀 다른 선택을 하게 됩니다. 오키나와는 2차 대전 말기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곳이었고, 전후에는 미국의 군정 아래 놓였습니다. 독립 국가가 될 수 있는 기회도 존재했습니다. 그러나 오키나와 주민들의 다수는 투표를 통해 일본에 재편입되는 길을 택했습니다. 물론 그 선택이 자유로운 판단이었는가에 대한 논의는 여전히 존재하지만, 중요한 건 오키나와는 ‘완전한 독립’보다는 ‘존속 가능한 소속’을 택했다는 점입니다.
반면, 한반도는 독립을 선택했고, 그 선택은 외부의 시혜가 아니라 우리 내부에서 솟아난 힘으로 실현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 순간을 기억해야 합니다.
단 한 줄로 끝나는 교과서의 문장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모든 외교적 갈등, 동맹국의 논쟁,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포기하지 않았던 기억을 다시 꺼내야 합니다.
독립은 선언된 것이 아니라 쟁취된 것입니다.
포츠담 회담에서의 그 한 줄은, 윤봉길의 투쟁과 수많은 무명의 독립운동가들의 이름 위에 얹힌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한 줄은 우리가 만들어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