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뱀의 전설이 지켜낸 한국의 살아있는 역사
우리는 일제강점기라는 수탈의 역사와 6.25 전쟁이라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으며 국토가 황폐화되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민족의 정기를 끊겠다는 명분으로, 혹은 전쟁 물자를 조달한다는 구실로 수많은 거목이 잘려 나갔고, 포화 속에 산천이 불탔습니다. 그러니 수백 년 세월을 간직한 거목이 온전한 모습으로 살아남기란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을 겁니다. 그들의 편견은 어쩌면 우리의 슬픈 역사가 남긴 흉터를 가리키는 말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강원도 원주에는 이런 슬픈 역사의 공식을 보란 듯이 깨트리는 존재가 숨 쉬고 있습니다.
높이만 30미터가 넘고, 가지가 뻗은 폭이 30미터에 달해 마치 거대한 황금빛 구름이 내려앉은 듯한 압도적인 자태를 뽐내는 '반계리 은행나무'가 그 주인공입니다. 멀리서 보아도 단숨에 시선을 사로잡는 이 나무는 일본인들이 한국에는 없을 것이라 단정 지었던 바로 그 '세계수'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이 나무는 어떻게 그 서슬 퍼런 수탈의 시대와 전쟁의 화마를 피해 무사히 천년 가까운 세월을 건너올 수 있었을까요? 여기에는 아주 흥미롭고도 신비로운 전설이 서려 있습니다.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인들은 이 거대한 나무를 베어 전쟁 물자로 쓰려고 했다고 합니다. 톱과 도끼를 들고 나무 앞에 섰을 때, 그들을 멈춰 세운 것은 마을 사람들 사이에 전해 내려오던 이야기였습니다. 이 나무 안에는 커다란 흰 뱀이 살고 있어서, 나무를 해치려 하는 자는 그 흰 뱀의 저주를 받아 화를 입게 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아무리 미신이라 치부하려 해도, 오랜 세월 마을을 지켜온 영물에 얽힌 섬뜩한 경고 앞에서는 그들도 감히 도끼날을 들이밀 수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나무 안에 산다는 흰 뱀의 전설이, 혹은 그 전설을 믿고 나무를 지키려 했던 우리 선조들의 간절한 마음이 톱날로부터 이 거목을 지켜낸 방패막이가 되었습니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은, 과거 이 나무를 베어버리려 했던 일본인들이 이제는 관광객이 되어 그 웅장한 자태를 보러 이곳을 찾는다는 사실입니다. 한국에는 큰 나무가 없다는 그들의 편견을, 이 나무는 말없이 그리고 압도적인 존재감으로 반박하고 있는 셈입니다.
반계리 은행나무는 단순히 크기가 큰 식물이 아닙니다. 그것은 외부의 침략과 전쟁이라는 모진 풍파 속에서도 끝내 살아남은 우리 민족의 끈질긴 생명력을 상징합니다. 일본인들의 편견 섞인 시선 뒤에는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아픈 역사가 있고, 그 역사를 딛고 우뚝 선 이 나무는 지금도 우리에게 무언의 교훈을 전하고 있습니다. 가장 한국적인 아름다움은 화려함이 아니라, 고난을 견디고 지켜낸 꿋꿋함에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