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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윌마 Nov 24. 2020

대지, 펄 벅

나는 어느 대지 위에 서 있는가?


평사리를 품고 흐르는 섬진강은 나를 기다려주지 않았다. 돛단배를 타고 같이 흘러가고픈 마음이 커질수록 갈증은 심해졌다. 마흔이 되어서야 강물에 목을 축였다. 마지막 책장을 넘기기 전까지 나는 박경리 선생의 <토지>에게 빚진 사람이었다. 휴가를 통째로 바치지 않고서는 잡을 자신이 없는 책이었다. 그렇게 마음에 짐이 된 책이 몇 권 더 있다. 펄 벅의 <대지>를 읽었다.


대하소설에는 사랑과 질투, 전쟁과 혁명, 만남과 헤어짐의 서사가 파란만장하게 엮어져 있다. 그 서사는 등장인물들의 삶과 죽음을 중심축으로 흐른다. 자기가 결국 죽어야 하는 유한한 존재라는 인식은 자신의 존재를 극명하게 드러내는 계기가 된다. 이 밤의 끝을 잡고 더 이상 자신의 삶이, 사랑이 초라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다. 진정한 존재양식을 가능케 하는 죽음이라는 유한성이 동전의 한 면이라면 다른 면에서는 무엇이 있을까? 당연히 탄생이다. 진정한 기적과 가능성은 새로운 탄생에서 나온다. 수많은 탄생은 고유하고 개별적인 남자와 여자 그리고 아이들로 이루어진 세상을 만든다. 한나 아렌트는 이것을 ‘복수성’이라고 불렀다. 공동체 안에서 평등과 차이라는 이중적 가치가 공존해야만 복수성은 건강하게 자란다.

동전의 양 면으로 표현했지만 하이데거의 죽음과 진정성, 한나 아렌트의 탄생과 복수성은 서로 겨루는 듯하다.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잠깐 신영복 선생님의 서화집을 펼쳐본다. 서화집은 ‘처음처럼’으로 시작해서 ‘석과불식(
碩果不食)’으로 끝난다. 신영복 선생님은 ‘처음처럼’을 세상에 내면서, 산다는 것은 수많은 처음을 만들어가는 끊임없는 시작이라고 하셨다. 또한 무성한 잎사귀를 죄다 떨구고 겨울의 입구에서 앙상한 나목으로 서 있는 감나무의 가지 끝에 걸린 감 한 개를 가리켜 ‘석과불식’을 말씀하셨다. 씨 과일은 먹지 않는다는 것인데, 그 씨가 이듬해 봄에 새싹이 되어 땅을 밟고 일어서는 이유에서다.

처음처럼의 새싹과 석과불식의 씨를 연결시켜주는 것이 바로 ‘땅’이다. 변함없이 그 자리를 지키는 ‘대지’다. 자신을 냉철하게 직시하는 성찰은 대지에 뿌리를 깊게 한다. 뿌리내린 나무가 늘어서 숲이 되고 세대를 이어가면서 연속성을 갖는다. 죽음과 탄생은 대지를 통해 필연적으로 연결된다. 하지만 풍성한 과실에 취하면 발은 땅에서 멀어지고 구름 위를 걷는다. 넘실대며 들이치는 파도는 매 순간 삶과 죽음을 섞어 버린다. 발버둥 치기에 급급해 바로 밑에 대지가 있다는 것을 놓치는 것이 현실이다.

주인공 왕룽은 자신의 존재 가치를 땅에서 찾는다. 땅을 일구는 노력만큼 거둔다는 단순한 진리를 흙의 감촉을 통해 뼈와 살에 새긴다. 대갓집에 종이었던 왕룽의 아내 오란은 출산과 노동에서 자신의 의미를 찾는다. 자신이 원해서가 아니라 주어진 틀 안에서 자신에게 허락된 유일한 여백이기 때문이다. 그녀의 삶은 힘들다. 그림에서 여인이 신은 까만 전족이 눈에 띈다. 일반적으로 전족은 작은 발 한 쌍을 갖기 위해 한 항아리의 눈물을 쏟아야 했던 고통의 상징이지만, 오란에게는 한 번도 신어보지 못한 동경과 결핍의 상징이다. 오란이 죽어가면서 헛소리처럼 남긴 말이 가슴을 찌른다. ‘제발 때리지 마세요’, ‘아버지… 어머니…’ 왕룽은 땅을 팔기 시작하면 집안이 망한다고 자식들을 다그치지만 자식들에게 땅은 그저 목돈을 만질 수 있는 기회일 뿐이다. 자식들은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석과(씨 과일)로 땅에 뿌리를 내려 새싹을 틔울 수 있을까?

읽는 동안 <토지> 최서희의 집념을 만났고, 붉은 노을을 등지고 드넓은 들판에서 풀을 베던 <안나 카레니나> 레빈의 땀방울을 보았다. 부잣집에서 기생하는 쥐처럼 풍요로운 도시에서 소외된 삶을 사는 왕룽 가족은 영화 <기생충>을 떠올리기에 충분했다. 아내 오란이 죽어가고 있는 그 순간까지 왕룽은 자줏빛으로 변한 그녀의 큰 입술 사이로 이가 드러나 고이는 것을 추하게 생각한다. 이러한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며 스스로 미웠다고 표현한 장면에서는 시인 김수영의 ‘시적 양심’이 엿보였다. 이렇게 다양한 주제를 품어주기에 ‘대지’라는 제목이 허락되지 않았을까.

엄마 품에서 벗어난 지 오래되었다. 어느새 나를 딛고 자라는 새싹이 셋이다. 대지는 삶과 죽음을 이어주는 토대다. 오늘은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라는 질문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묻는다. 나는 어느 대지 위에 서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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