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접 해보지 않으면 아무도 몰라
나는 국제학교를 졸업하자 바로 대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다 보니 나는 20살이 되기도 전에 졸업할 수 있었다. 그렇게 졸업 후 한국에 들어와서 처음 일하게 된 곳은 고깃집이었다. 사람들이 추천하지 않는다는 가족과의 동업이었다. 자영업이 얼마나 힘든지도 모르고 나는 그저 새로운 환경에 신기해하며 열심히 일을 배워나갔다.
우리 가게는 24시간 운영하는 3층짜리 큰 고깃집이었다. 사람은 역시 직접 경험해봐야 깨닫는다고, 고깃집 운영을 위해 뒤에서 준비해야 하는 일이 그렇게 많고 힘든 줄 몰랐다. 출근하면 홀 청소가 하루 일과의 시작이었다. 허리를 계속 숙이면서 닥트, 테이블, 의자, 창문, 바닥 등 쓸고 닦다 보니 허리가 끊어지는 줄 알았다. 본격적인 점심 영업을 위해서 물도 채우고, 휴지도 채우고, 밑반찬도 챙기면서 준비한다. 처음엔 뜨거운 뚝배기가 넘쳐서 데일까 봐 무서워서 카트를 밀어서 서빙하거나 하나씩 들어서 서빙했다. 하지만 사람도 많고 바쁜 점심시간에 카트를 밀면서 하나하나 서빙하기에는 너무 번거로웠다. 나중엔 양손에 뚝배기 하나씩 들고, 사람들이 사용한 휴지도 맨손으로 못 집던 나는 상여자처럼 턱턱 집어서 버렸다. 점심 영업이 끝나면 직원들의 식사 시간이었다. 밥 먹으려고 딱 앉기만 하면 다 끝난 점심 손님 몇 분이 들어오기도 했다. 이모님들과 나는 누가 응대할지 눈치를 봤던 것 같다. 한창 바쁘게 일하고 배고픈 뒤에 누가 계속 움직이고 싶겠나. 그렇게 식사하고 나면 번갈아서 쉬는 시간을 가졌다.
우리 가게는 정육점처럼 고기를 판매해서 손님들이 직접 가져가서 먹었다. 나와 이모님들은 손님이 많지 않을 때는 직접 하나하나 구워주기도 했다. 소고기는 기름이 없는 부위부터 여러 번 뒤집지 않아야 한다고 배웠다. 나는 가위로 고기를 사각-하고 자를 때의 쾌감이 좋았다. 사실, 고기를 굽고 나면 가끔 주시는 손님들의 팁도 좋았다. 돈이 좋기도 했지만, 잘 구웠다는 칭찬의 의미로 느껴졌다. 그렇게 저녁 손님을 받고 밤 10시에 정산을 마친 뒤에 퇴근했다. 새벽에 일하는 이모님들이 종종 일주일에 한 번씩 휴무를 가지면 내가 대타로 들어가기도 했다. 새벽 영업 때는 손님이 계속 있는 게 아니다 보니까 숯불을 꺼뜨리지 않는 게 어려웠다. 처음엔 불을 꺼뜨려서 손님을 한참 기다리게 했다. 그날 엄청 진땀을 빼서 야간에 일하기 무서웠지만, 야간에 받는 주간보다 높은 수당이 좋았다. 이때 열심히 벌어둔 돈을 재테크나 저축했으면 좋았을 텐데, 처음 만져보는 큰돈에 열심히 쓰는 재미에 빠졌었다. 부모님께 배울 시간이나 기회도 없었다. 유튜브 보면 혼자 알아서 재테크 하는 동년배 친구들 많던데. 20살 되고 제일 후회되는 순간이다.
다시 가게 이야기로 돌아와서, 주류 발주, 야채 다듬기, 정산, 사무보조 등 정말 셀 수 없이 많은 일들이 나를 기다렸다. 힘든 일을 하면서 나의 유일한 낙은 손님들과의 스몰토크였다. 스몰토크를 하다보니, ‘세상은 정말 좁다’라고 느끼게 해준 일화도 있었다. 손님들이 한창 내가 어렸을 적에 살던 고향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팬지: “고향이 해남이세요~? 어렸을 때 저도 해남에 살았었어요!“
손님: (깜짝 놀란 듯이) “누구랑 살았는데?”
팬지: “할머니랑 큰아버지랑 살았었어요.”
놀랍게도 손님은 내 큰아버지 이름을 이야기하셨을 뿐 아니라, 내 아버지까지 아시는 분이셨다. 또 다른 일화로는 나중에 일하게 된 곳에서 내 가게에 방문한 적이 있는 분들을 만나기도 했었다. 초반에는 이런 작은 에피소드여도 나를 재미있게 만들기는 충분했다. 점점 가족 동업과 자영업의 고충이 다가오기 전까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