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다. 사무실에는 전화 벨소리와 직원들의 통화 소리, 간간이 들려오는 한숨소리가 가득하다. 컴퓨터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와 프린터가 돌아가는 웅웅 거림은 배경음악처럼 깔려 있다.
갑자기 판촉사원이 아파서 못 나오겠다고 하질 않나, 친척이 돌아가셨다고 하질 않나, 집안 사정이 복잡해서 일을 못 하겠다는 연락을 받기도 한다. 또 어떤 날은 그냥 연락도 안 받고 잠수를 타버리기도 한다. 반복되는 수많은 사건사고들로 마음속에 무거운 돌덩이가 내려앉는 기분이 든다.
이 일을 하면서 정말 수없이 많은 사건사고가 있었지만, 지금도 너무 또렷하게 기억나는 진짜 어이없는 황당한 사건이 있었다. 오늘 당장 근무를 해야 하는 판촉 아르바이트 사원이 아침부터 팀장한테 전화해서 출근준비하다 계단에서 미끄러져서 발등을 다쳤다고 했다. 그날은 비가 내리던 날이었다.
사무실 창문에 부딪히는 빗방울 소리가 소음처럼 들리는데, 전화를 받은 팀장의 한숨 섞인 목소리가 둔탁하게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보다 훨씬 크게 들렸다. 중요한 행사 첫날 펑크라니.....
고객사에 보고하니 병원 진료 확인서라도 받아보라고 난리가 났다. 비가 와서 일하기 싫어서 그러는 거 아니냐는 말까지 들었다. 사실, 행사 당일에 말도 없이 잠수를 타거나 어이없는 거짓말로 상황을 곤란하게 만드는 아르바이트들이 종종 있긴 하다.
병원에 다녀오면 진료 확인서를 보내달라고 요청했더니, 그 아르바이트생이 보내온 건 진료 확인서가 아니라 발등을 꿰맨 사진이었다. 우리는 다친 줄 알고 고객사에 그 사진을 보냈다. 병원에 아직 못 갔으니 우선 사진만 보낸 것이라고 설명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몇 분 뒤, 고객사에서 지금 장난하냐며 화를 냈다.
스피커로 들려오는 고객사의 화난 목소리가 빗소리보다도 크게 울렸다.
심장이 쿵쾅대고 손에는 식은땀이 흘렀다.
다시 사진을 보니, 꿰맨 게 아니라 꿰맨 것처럼
자기 발등에 그림을 그려 놓은 것이었다.
정말 숨이 막히는 순간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우리가 너무 급한 나머지 사진을 제대로 확인도 안 하고 보낸 아주 큰 실수였다.
그날을 떠올리면 아직도 등에서 땀이 흐른다.
차가운 공기가 피부를 자극하는 느낌이고,
입 안에는 쓴 커피 맛이 남아 있다.
그 상황을 수습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직원들과 빠르게 대화하고, 문제 해결에만 집중했다.
그때 생각했다. '갑'일 때는 몰랐던 '을'의 무게를. '갑'이라는 위치가 주는 권한이 '을'의 입장에서는 짐처럼 느껴질 수 있겠다는 걸.
하지만 이런 경험 덕분에 나도 더 단단해졌다.
그리고 확실한 건, '을'의 위치에 있어도 내가 맡은 일을 제대로 하면 충분히 당당해질 수 있다는 거다.
나도 처음엔 주눅 들 때가 많았지만, 내가 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을 때 가장 떳떳해졌다.
고객사가 무리한 요구를 해와도
내가 할 일을 분명히 하고,
상황을 잘 설명하면
오히려 그들이 나를 더 신뢰하게 되었다.
또, '을'의 입장에서 일하면서도
자존감을 지키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다.
내가 하는 일에 자부심을 갖고 최선을 다하는 게 결국 나 자신을 더 당당하게 만들어 준다.
사람들이 '을'의 위치를 약자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을'로 시작해도 맡은 일을 제대로 하면 그 진정성을 누구도 무시할 수 없다.
그래서 지금은 어디서든 내가 당당하게 일할 수 있다. 그게 내가 성장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다.
'을'의 위치에 있더라도 내가 하는 일이 세상에 중요한 가치를 더하고 있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그 자체로도 충분히 자랑스러운 일이다.
결국 '갑'이냐 '을'이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내가 어떤 태도로 일하느냐가 더 중요하다.
'을'의 위치에서도 최선을 다하면, 그 자리에서도 충분히 빛날 수 있다.
그리고 때로는 '갑'이든 '을'이든 그 구분을 잊고, 그냥 내 일을 사랑하고 내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게 더 행복한 길일지도 모른다.
인내심을 가져라 모든 것은 적당한 때에 결국 네게 올 테니 언젠가 너는 네가 있어야 할 곳에서 너와 함께 할 운명인 사람과 네가 해야 할 일을 하며 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