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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olo Jun 28. 2024

난 곳을 잃어야만 한다는 것에 대하여 (해외이직기)-5

인생 2막, 머나먼 유럽에서

1편 https://brunch.co.kr/@paolo/31

2편 https://brunch.co.kr/@paolo/32

3편 https://brunch.co.kr/@paolo/33

4편 https://brunch.co.kr/@paolo/34


난 곳을 안고는 갈 수 없었다. 난 곳을 떠나야만 했다 그렇게 나는 난 곳을 잃어야만 했다. 나는 신께도 그래서 더 빌었다. '난 곳을 잃겠다고 그러니 내 길을 걷게만 해달라고'. 나의 부끄러운 기도를 신은 그래서 들어주신 걸까. 마치 오랫동안 준비해 왔던 일인 것처럼, 아니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이젠 걷기만 하면 되는 걸까?.


5편


1. 걷는 것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특히 앞으로 걷는 것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나는 과연 앞으로 걷고 있었던 걸까?. 앞으로 간다는 것은 시간이 걷는 것과 같은 걸까. 아니면 남들이 걸었던 길로, 걸어가는 길로 가는 것이 앞으로 걷는 걸까. 시간이 걸어야 하는가, 내가 걸어야 하는가?. 문득 이런 생각들이 날아든다. 여유로운 상념 속에서 속상한 것이 있다면, 시간은 빠르게 더 빠르게만 걸어가는 것이다. 뒤로 걸을 수는 없었기에, 적어도 나는 그런 용기를 가지지 못했기에 수 없이 뒤를 돌아만 보았다. 용기는 시간을 싫어하나 보다 이렇게 뒷걸음질 치는 걸 보면.


2.  단순하게만 생각하고 싶은데, 복잡하게만 생각이 차오른다. 억겁의 세월도 아닌데 어찌 이리 복잡한지, 한참을 또 생각에 잠겨든다. 생각을 이겨낼 수도 없는데, 휘저어 흐트러진 생각들은 보란 듯이 또 다른 생각들을 부른다. 쌓이고 쌓인 것들을 헤집다 보니, 결국 내 손에 잡히는 것들은 저만치 뒤에 흘려둔 내 모습들이었다. 뒤로 걸을 순 없는데, 뒤를 뒤돌아 보는 나. 앞으로 걸어야만 하는데, 앞으로 걷는지는 알 수 없는 나. 시간은 야속하게 더 빨리 걸으며, 자꾸 나를 보챈다. 지나고 보니 이런 생각이 든다. 시간이란 놈에 쫓기다 보니, 시간을 쫓기만 했다 보니 그래서 놓쳤나 보다. 소중했던 순간들을, 그 순간에 담겨진 것들을 그리고 보려고 했도 보이지 않았던 것들을 말이다. 뛰다가 흘린 것들도 결국 나였다. 뒤를 돌아봐도 보이는 것들도 나였다. 단순한 머리로 아무리 복잡하게 생각해도 결론은 나여야만 했다. 복잡한 머리로 아무리 단순하게 생각해도 결론은 나여야만 할 것 같다. 그래 이제 어떻게 걸으면 되는 걸까?.

 비행기가 다녔고 자전거가 다니며 강아지가 뛰고 사람도 걷고 뛰는 이 길은 누구의 길인가.

 다들 어디를 보고 향하는지 나는 아직도 알길이 없다.

 Tempelhofer Damm, 12101 Berlin


3. 생각은 많은데 움직임은 없었다. 천근만근의 일은 오롯이 생각들이 다했다. 몸이란 놈은 빈둥빈둥거리니 사람들은 그런 나를 보고 몽상가라고들 했다. 빈둥거리며 하릴없이 있다 보니 그런 나를 한량이라고들 했다. 몽상가와 한량은 서로 기분이 나빠야 하나?. 누가 더 언짢고, 누가 더 억울한가?. 억울함이 있다면, 신은 그 억울함은 알 테다. 말하지 않아도 다 알 테다. 세상은 드러나는 데로 흘러가지도 않고, 흘러가는 대로 드러나지도 않으니까. 몽상가와 한량은 처음부터 몽상가와 한량이었을까. 세심한 몽상가와 부지런한 한량도 있을 테다. 그저 하다 보니 태초의 기질로, 원초적 나로 걸었던 건 아닐까. 그래서 몽상가와 한량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말이다. 난 곳을 잃는다는 것은 '몽상'일 테다. 어떻게 난 곳을 잃을 수 있을까?. 떠나면 되지 왜 잃어야 하나?. 한량은 이미 다해봤다는 듯이 몽상가를 꾸짖는다. 그런 자기를 다른 이들이 손가락질하는지는 모르고. 그래도 한량은 개의치 않는다. 태초부터 한량인 사람은 그 누구도 없기에. 뒤를 돌아보면 결국 '내'가 다 있다.


4. 나를 위한 걸음, 그 첫 시작은 나를 위한 떠남이었다. 그래서 떠남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집을 떠나는 것, 고향을 떠나는 것, 직장을 떠나는 것, 습관을 떠나는 것, 콩나물시루 같은 지하철에서의 아침을 떠나는 것, 매달 25일(월급일)의 기다림에서 떠나는 것, 저녁마다 술 한잔 먹자며 오는 연락을 떠나는 것, 가을이 오면 가을 전어에 소주 한잔을 털어 넘기는 것에서 떠나는 것. 수 없이 많은 것들이 이 단순한 머리를 복잡하게도 채운다. 떠나야만 하는데, 떠날 수가 없다. 익숙해서 반가운데, 익숙하지 않아야만 하니 반갑지도 않다. 첫걸음은 그래서 무겁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은 반은 맞는 말인 거 같기도 하다. 익숙함에 절여 지낸 시간들이 나를 꽁꽁 싸맨다. 시작하기 조차 어렵다. 시작은 반인데, 시작할 엄두조차 쉬이 내지 못한다. 생각에만 공산이 크다. 새해에 낯선 무언가를 시작하는 것이 선언적이면서도 공허한 것도 결국 생각에만 그치기 때문인가 보다. 그래서 우리 모두 비슷한 모습으로 비슷하게 걷고 그렇게 비슷하게 생각한다. 새해의 선언은 다 어디 로들 갔나. 시간은 돌아보지도 않고 저만치 서둘러 가는데, 시작 없는 생각에 그치기만 하니 나는 몽상가인가 한량인가?. 나를 위한 걸음, 그 진정한 시작은 그렇게 나를 위한 잃음이어야만 했다.


새해의 첫 커피 한잔이 주는 익숙함에는, 새해부터는 커피를 마시지 말아 보자는 나의 원대한 선언이 있었다.


6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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