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멍으로 초대
‘물멍’을 아시나요?
이 세상에는 수많은 ‘멍’들이 존재한다. 불멍, 물멍, 책멍, 식멍 등등등. 이런 ‘멍’들은 공통점이 있다. 그저 ‘멍하니 바라보는 것’이다. 나는 왜 이토록 많은 ‘멍’ 들 중에 ‘물멍’ 에 빠졌을까? 그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보니, 어항을 그저 바라보는 게 그냥 좋았다. 그냥 좋다는 말이 딱 어울리는 게 바로 '물멍' 이 아닐까?
나는 40대 평범한 직장인 가장이다. 두 아이의 아빠이며 한 여자의 남편이다. 돈 벌기 위해 출근한 지 벌써 20년이 지났다. 직업 특성상 야근이 많다. 퇴근 후 집에 오면 고요하다 못해 적막하다. 가족들은 모두 잠을 자고 있지만 물고기들은 나를 항상 기다리고 있다.
나는 잠들기 전에 책 한 권과 따뜻한 녹차를 준비하여 어항 앞으로 간다. 그리고 세상 편한 자세로 소파에 기댄다. 어항을 바라본다. 멍 ~ 물멍이 시작된다. 물고기들과 인사한다. 안시와 하스타투스, 달팽이, 그리고 초록의 수초들이 재잘거리며 말을 걸어온다.
“오늘도 고생했어, 오늘도 늦었네, 배 안 고파?”
“응 대충 회사에서 먹었어, 아참 너희들은 오늘 뭐 했어? 궁금해, 이야기를 들려들 수 있겠니?”
이렇게 어항을 바라보며 하루의 고단함을 털어낸다. 따뜻한 녹차향이 어항 조명과 함께 은은하게 퍼지면 기분이 몽글몽글 해진다. 나는 이때쯤 오른손에는 들고 있던 책을 천천히 펼친다. 어제 읽었던 부분으로 시선을 옮기며 천천히 독서를 한다. 분위기 있는 조명 불빛이 글씨 자간 사이로 스며든다. 근사한 어항 앞에 책장을 넘기며 사색에 잠겨있는 모습이라니 생각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리지 않는가?
이쯤 되면 나도 독서 좋아하는데, 어항 하나 놔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 것이다. (그럼 연락 주시길 어항 컨설팅은 무료다) 사실 나는 어항 앞에서 잠시 책을 읽는 습관이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었는데 사실 '별거'였다. 다음날 새벽 눈을 뜨면 전날 읽었던 책의 내용들이 마구 말을 걸어올 때가 많다. 물멍은 이처럼 글쓰기에도 도움이 되는 매우 건설적인 활동인 것으로 나는 굳게 믿고 있다.
한참 집중해서 책을 읽다 보면 Y자 안테나 수염이 화련한 안시 아빠가 종종 말을 걸어온다. (박찬호 선수처럼 TMI가 많은 게 흠이다.)
“파파 책 쓰기 잘 돼가? 왜 소식이 없어 12월까지 초고 완성한다고 했던 것 같은데”
“어 그랬었지… 갑자기 회사일도 바빠지고 에세이 쓰기 수업도 끝나서 좀 풀어지네, 내가 너무 나를 몰아세웠는지 번아웃이 온 것 같아…”
“파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어! 최선을 다하면 죽는다 말이 있잖아 (황선우, 김혼비작가 책), 파파 죽지 않았잖아! 그럼 최선을 다 안 한 거야. 아직 한참 멀었어. 열심히 써, 기획 출판이 어디 쉽나. 아무도 물고기 이야기는 관심에 없다고, 정신 바짝 차려! 이러다 책 못 내면 내 밥(물고기 사료)는 어떻게 사줄 거냐고"
그랬다. 안시 말이 백번 옳았다. 나는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 시장은 냉혹하다. 어떤 출판사가 대중이 1도 관심 없는 ‘물고기 이야기’에 출판 제안을 하겠는가? 안시 아빠는 나보다 지혜로운 놈이 분명했다. 오늘은 나에게 영감을 준 그에게 시골집에서 직접 채취한 ‘유기농 뽕잎’을 특식으로 줘야겠다.
나는 매일 물멍을 하리라. 이왕 이렇게 된 거 세상 모든 사람들이 물멍하는 그날까지, 물멍 전도사가 되어볼까나 ~
물멍 한잔하실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