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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즈플 Sep 14. 2023

세상을 보는 해상도를 높이고 싶어

'정확하다'



친한 친구 P와 동생, 그리고 저. 이렇게 셋이 여행을 가자며 여행계를 든 것이 4년이 넘었습니다. 전 세계적인 코로나 이슈로 인해 꽉 닫혀버린 여행길로 우리의 저금통은 터질 듯 부풀어 올랐습니다. 이번 해 여름, P와 제 퇴사시기가 겹치면서 그 부푼 풍선의 바람을 뺄 수 있는 기회가 생겼습니다. 우리는 신이 나 몽골 여행을 기획했습니다. 밤에는 별을 보고 낮에는 자연을 보며 드넓은 사막에서 말을 달려보자!


그 원대한 목표는 제 몸상태 때문에 취소되었습니다. 퇴사하고 나면 나아질 줄 알았던 몸은 루푸스와 코로나로 완전히 허물어져 응급실을 전전했죠. 하지만 모처럼의 좋은 기회를 이대로 버리기 아쉽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한번이라도 돈을 마음껏 써 보기로 했습니다.


호캉스! 뭐가 그리 좋기에 다들 호캉스를 떠난다고 하는지 궁금했습니다. 돈도 써본 사람이 잘 쓴다고 우리는 손을 벌벌 떨며 비싼 숙박비를 결제했습니다. 호텔 밖으로 나오지 않고 그 안에서 조식과 디저트도 먹어보았습니다. 눈이 휘둥그레해지는 5성급 호텔의 가격이었으나 새로운 경험들은 서울 한복판에서도 여행지에 간 것처럼 마냥 즐거웠습니다. 과거의 우리가 주는 선물이 이토록 달콤할 수 없었지요.


“와 최고다!”

“대박 멋있어!”


새로운 것을 경험할 때마다 우리가 외치던 말입니다. 우리는 감정과 느낌을 길게 표현하지 않았습니다. 십여 년을 알고 지낸 사이에 굳이 뭐 이런 걸 말로 표현하나 싶기도 했고, 내 느낌과 적확히 맞는 단어를 찾아 문장을 만들어 그 자리에서 구사하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 된 지 오래였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점점 느낌을 표현하는 감탄사는 단순해졌습니다. 내 맘 알지? 지금 네가 생각하고 있는 게 내 마음이야. 우리가 우스갯소리로 늘 하는 말입니다. 소위 블루투스식 소통이요.



네이버 웹툰 - 모죠의 일지



그날도 그런 날이었습니다. 맑은 통창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 아래, 햇볕알러지를 가진 나를 배려해 준 P가 그 뜨거운 온도를 작은 등으로 가린 채 앉아 있었습니다. 나는 자연의 달갑지 않은 선물을 비낀 채 소파에 기대어 차를 홀짝이고 있었습니다. 처음 차를 입에 대었을 때 '향이 좋다.'라는 문장이 내가 표현한 느낌의 전부였습니다. 우리는 침묵이 익숙하고 편안한 사이였기에 딱히 문제 될 것은 없었습니다.


“언어를 좀 더 다양하게 구사하고 싶어. 예쁘고 정갈하게.”

“내 머릿속에 있는 생각을 언어로 제대로 표현해 낼 수 있으면 내 세상이 그만큼 더 풍성해질 수 있을 것 같아.”


P의 말에 움찔한 나는 만지작거리던 찻잔을 내려놓았습니다. 가끔 멍청해지는 것 같다고 우스갯소리를 했으나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 없는 주제였습니다. 지금껏 우리의 소통방식은 블루투스적, 밈적 소통방식이었습니다. 친구들끼리는 짧은 대화 몇 마디로도 내가 느낀 것과 비슷한 감정을 유도하고 공감시키는 것이 어렵지 않았거든요. 내 말을 찰떡같이 알아들어주는 청자가 있으니까요.


‘밈적 소통’이라는 말은 결국 상대방과 내가 같은 문화와 느낌을 소유하고 있을 때만 가능합니다.

하지만 내가 지금 본 풍경을 엄마에게 가서 이야기해 주고 싶어도 엄마는 눈앞에서 본 것처럼 잘 이해할 수 있을까요? 70대 노신사에게 가서 설명해 주면 감동을 줄 수 있을까요? 혹은, 5년 후의 나에게 가서 다시 한번 설명한다면 그때의 감동을 다시 이해할 수 있을까요?


인간의 소통은 언어라는 이스트로 생각이라는 빵을 부풀리는 게 아닐까. 인간은 생각을 치열하게 하고 잘 정리하고 산다고 생각하지만, 막상 뇌에서 꺼내놓고 보면 밀가루 반죽처럼 텅 소리가 나게 묵직한 덩어리 조각일 뿐일지도 모릅니다. 여기에 이스트를 넣고 잘 발효시켜 열심히 치댄 후, 내가 상대방에게 덜어내고 싶은 부분만 적당히 덜어내어 예쁘게 모양을 내고 구운 후에야 여러 겹이 살아있는 부드러운 빵이 되겠지요.


“난 내 세상이 풍성한 크로와상처럼 겹겹이 살아있기를 바라.”

“나 페스츄리 좋아해.”

“나도.”


우리는 히히 웃었습니다. 굳이 미사여구를 붙일 필요도 없었고 거창한 단어를 말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인터넷을 오래 접하고 핸드폰을 오래 붙잡게 되면서 카카오톡으로 이모티콘을 자주 사용하게 되고 재밌으면 ㅋㅋㅋㅋ으로, 슬프면 ㅠㅠㅠㅠ로 감정을 표현했습니다. 무언가를 경험할 때 이모티콘이나 줄임말을 사용하지 않고 최대한 구체적으로 표현하기. 정확한 표현을 사용하기.

눈앞의 차향을 맡아보고 느릿느릿 아이가 말을 배울 때처럼 입을 뗐습니다.


"아까보다 향이 옅어졌어. 처음 막 차를 따랐을 때는 고소한 향이 앉아있는 자리까지 올라올 정도로 진했거든. 지금은 식으면서 씁쓰름한 얼그레이 향이 더 많이 올라오는 것 같아. 나른한 느낌이 들고 오전 중에 마시면 피곤함이 가실 것 같다는 생각도 들어. 나는 개인적으로 향이 진한 걸 좋아해서 온도가 더 높았을 때가 좋지만 디저트와 먹기에는 씁쓸한 쪽이 깔끔한 것 같아."


괜히 부끄러웠습니다. 내 느낌을 다른 사람들에게 표현하는 것이 이렇게 어려운 줄은 몰랐습니다. 말하는 중간에도 더듬거리고, 음... 음... 하며 생각하는 시간이 필요했지만 어떻게든 말을 마쳤습니다. P와 동생은 제 말을 끝까지 기다려주고 아무도 웃지 않았습니다. 아까 차를 따를 때 제 차향이 자신의 자리까지 퍼졌다고 이야기해 주기도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각자 마시던 차의 향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차와 커피에 대한 나름의 감상을 듣는 시간은 매우 색다르고 즐거운 경험이었습니다.


우리는 서툴지만 연습해 보기로 했습니다. 세상의 해상도를 높여보기로.




정확하다

1. 바르고 확실하다.
2. 자세하고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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