늑대물린여자 04
나는 의사 선생님의 조언에 힘입어 열심히 운동을 하기로 했다.
바쁜 일과 동안에도 짬을 내어 점심시간과 저녁시간에 회사 밖에서 산책을 했다. 향기로운 풀내음과 강한 햇살. 우리 회사는 산속에 있는 병원이었으므로 계절에 따라 달라지는 자연을 마음껏 감상할 수 있었다. 차나 인파에 치일 염려도 없이 조깅을 하고 있자면 열심히 살고 있다는 생각에 뿌듯함이 밀려들었다. 산림욕을 하는 기분을 느끼며 깊게 호흡하고 심신을 안정시키려 노력했다.
그러다 보니 걷는 것만으로도 건강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역시 야외에서 걷는 게 최고야! 열심히 걸으니 입맛도 사라져 살이 쭉쭉 빠졌다.
어머, 나 이번 기회에 다이어트를 좀 해볼까 봐. 항상 식욕에 굴복하고 다이어트를 놔주어야만 했던 20대의 마지막에 ‘수련’과 ‘다이어트’ 두 마리 토끼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의욕이 활활 불타올랐다.
수련을 시작하면 다들 살이 찐다던데 3개월 만에 10키로 넘게 빠졌다. 주변에서는 정말 잘하고 있다고 박수를 쳤다. 나도 아무 이유 없이 빠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식이요법과 운동을 병행해 빠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운동을 해서 입맛이 없는 것이라고 여겼다. 이건 기회지! 이렇게 잘 된 일일 수가 없었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날이 더워지면서 안 그래도 약해진 체력에 구멍이 나 비실비실해졌다. 어릴 적부터 100m 달리기는 늘 하위권이었지만 오래 달리기만큼은 상위권에 머물렀다. 선생님들도 모두 엉덩이 힘만큼은 대단한 친구라고 칭찬했다. 그만큼 무언가를 꾸준히 노력하는 것에는, 지구력 하나만큼은 자신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구멍이 난 독에 물을 쏟아붓는 느낌이었다. 업무시간에도 멍하게 있는 일이 잦아지고 제대로 집중해 영어 단어나 전공 공부하는 시간은 나날이 짧아졌다. 과제를 할 때도 같은 문장을 두세 번 반복해야 했고, 환자와의 면담을 마치고 나오자마자 면담내용이 머릿속에서 가물가물해졌다.
남양주에서 서울까지 두 시간 거리를 출퇴근하던 나는 그 길을 한 번에 운전하기 어려워졌다. 중간에 차를 멈추고 자다가 가기를 여러 번이었다. 선생님들과 다 함께 사무실 청소를 할 때면 10분 넘게 같은 곳만 멍하게 닦고 있다가 한소리를 듣기도 했다.
탈모가 시작되었다. 머리를 손빗으로 빗으면 흡사 고양이처럼 머리카락이 한 움큼씩 빠졌다. 영양소를 부족하게 먹고 있는 건 아닌데 다이어트를 하면 어쩔 수 없이 이렇게 빠지는 건가? 목욕을 한 번 할 때마다 수채구멍 가득히 머리카락이 쌓였다. 샤워 중간에 수채구멍을 정리하지 않으면 물이 빠지지 않아 두세 번씩 머리카락을 정리해야 할 정도였다.
서울 한복판, 나의 동네에는 피부과가 6곳이나 있었으나 모두 미용 시술을 전문으로 하고 있었다. 그들은 탈모는 전문의의 치료라 자신들은 볼 수 없다고 했다.
특히 여성 탈모는 남성 탈모와는 달리 호르몬 문제 때문에 탈모약을 쓰지 못한다며 약국에 가서 미녹시딜이나 사다가 발라보란다. (의사 한 명의 개인적인 의견을 옮겨 적었다.) 열심히 미녹시딜이라는 약을 바르고 약국약을 먹어도 탈모는 점점 심해지고 머리카락도 눈에 띄게 얇아졌으며 색까지 갈색으로 바래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직장 선생님들은 그 당시 내가 염색과 펌을 한 줄 아셨다고 한다. 나는 어느새 햇빛을 받으면 주황색인가 싶을 정도로 연한 자연갈색의 머리카락이 되었다. 더불어 뚝뚝 끊기고 차분하게 가라앉는 얇은 실머리카락으로 바뀌었다.
"괜찮아, 나름 색깔 예뻐." 라며 자위하기에는 매 순간 뒷목을 타고 후드득 떨어지는 머리카락의 느낌이 선뜩해 어느 날은 머리카락이 몽땅 사라져 버리는 악몽을 꾸기도 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네 몸이 그 지경인데 왜 정밀 검사를 안 받아봤어?라고 물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내게는 저런 증상들을 듣고 어느 과를 가야 할지 추천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주위에 없었다. 나는 20대의 젊은 여성이었고, 내가 겪는 질병들은 사소한 염증과 피로 증상이 원인인 병들이었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 요 몇 개월 사이에 몸이 피로하고 어딘가에 염증이 생긴 적이 있지 않았나? 혹은 탈모로 고생하고 있지는 않나? 이렇게 물었을 때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방금 나열한 사항들은 현대인의 고질병이지 않나. 나도 당신도 갖고 있는 질병들이니 의사들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자꾸 뭔가 이상하다고 말하는 나에게 차라리 정신과를 가보라고 했지.
심지어 나의 몸에 대해 물을 수 있는 전문가들에게서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젊은 나이의 여자에게 큰 병은 안 생겨요.”였다.
큰 병을 의심하기에는 내가 너무 젊으니까. 다이어트 중인 여성에게 흔히 생길 수 있는 탈모와 질병들이니까. 내 증상이 너무 약하니까 의사들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다른 모든 증상을 합쳐서 토로해 보아도 그네들은 자신의 주력 분야 이외에는 관심이 없으니 섣불리 진단 내리기 어려웠을지도 모르겠다고 지금 와서는 생각한다.
이상하다, 이상하다고 외치던 나 또한 남들의 말에 어느 순간 순응하기 시작했다.
개구리를 삶을 때에는 찬물을 담은 냄비에 넣고 천천히 끓이면 된다고 한다. 어느샌가 온도가 임계점을 넘어 남들이 들었을 때는 확연히 이상한 증상들임에도, 나는 삶아지는 냄비 속의 개구리처럼 마지막 물장구를 유유자적하게 치고 있었다.
아, 따뜻하다. 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