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과 권위 사이, 우리가 묻는 존재의 태도
'꼰대'라는 단어가 입에 오르는 순간, 한 사람의 목소리는 사라집니다.
마치 시대를 읽지 못한 채, 자신의 언어에 갇혀 버린 사람처럼 보이게 되는 것이지요.
그 순간부터는 아무리 설명해도, 진심을 담아도 잘 들리지 않습니다.
"여기 시대를 읽지 못한 자가 잠들어 있다." 그런 묘비명이 마음속에 조용히 새겨집니다.
요즘 당신은 누구에게 '꼰대'라 불리고 있나요? 이제 이 말은 단순히 나이의 많고 적음을 가리키는 표현이 아닙니다. 어떤 태도, 어떤 말투, 어떤 존재 방식을 향한 하나의 평가가 되어버렸습니다.
때로는 다음 세대가 이전 세대를 향해 던지는 무언의 판결문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렇게 '꼰대'라는 낙인이 찍히는 순간, 그 사람의 진심은 소음이 되고, 그가 쌓아온 경험은 한순간에 무의미해집니다. 참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누군가를 가르치고 싶어 하는 사람이 '꼰대'라 불리는 순간, 정작 아무도 그에게서 배우려 하지 않습니다. 가르침과 배움 사이의 이 깊은 간극, 어쩌면 그것이 오늘날 우리 사회가 겪는 가장 큰 비극일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저는 가끔 이렇게 스스로에게 되묻습니다.
"나는 과연 꼰대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마흔을 넘긴 이후부터는 이 질문이 점점 더 자주, 점점 더 절실하게 떠오릅니다.
누군가 제게 '꼰대'라고 칭하면, 저는 순간 말문이 막힙니다. 단지 놀리기 위해서라기보다는, 그 말 속에는 시대가 제게 던지는 조용하지만 날카로운 질문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지금도 열린 마음으로 배우고 있는가? 혹시 마음을 닫은 채, 내가 아는 방식만을 고수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예컨대 "요즘 애들은…"이라는 말이 무심코 입 밖으로 나왔을 때, 저는 제 안에서 뭔가 오래되고 위험한 감각이 깨어나는 걸 느낍니다. 그 순간, 이렇게 생각하게 됩니다. 혹시 지금 내가, 내가 그토록 비판하던 그 모습과 다르지 않은 건 아닐까? 지금 나는 새로운 것을 들으려는 마음보다, 이미 아는 것만을 일방적으로 말하고 있지는 않을까?
말이라는 건 참 묘한 힘을 가졌습니다. 말을 통해 누군가를 이해할 수도 있지만, 말 때문에 누군가를 단정짓기도 하니까요. 그래서 저는 늘 조심하려고 합니다. 내가 하는 말이 나 자신을 가두는 틀이 되지 않도록, 말을 던지기 전에 먼저 나 자신에게 그 말을 묻고 있는가를 살펴보려 합니다.
말을 다루는 사람이 아닌, 말에 끌려다니는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꼰대'라는 단어의 정확한 어원은 알 수 없지만, 남을 가르치려 드는 사람에 대한 불편한 시선은 오래전부터 있어 왔습니다. 다만 오늘날의 '꼰대'는 예전과는 전혀 다른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경청하지 않는 태도, 시대를 읽지 못하는 사고방식, 그리고 타인을 존중하지 않는 말투. 이런 것들이 '꼰대'라는 말 속에 함축되어 있지요. 결국 이 단어는 단순한 세대 갈등의 언어가 아니라, 권위에 대한 사회의 인식이 바뀌었다는 하나의 신호입니다. 과거에는 나이와 경험이 곧 권위였지만, 지금은 '공감'과 '태도'가 더 중요한 기준이 되었습니다.
이 변화는 산업화 시대에서 정보화 시대로, 수직적인 사회 구조에서 수평적인 네트워크 사회로 바뀌는 흐름 속에서 자연스럽게 생긴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하나의 권위 언어가 무너지고, 수많은 작은 언어들이 함께 공존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한편, '영포티(Young Forty)'라는 단어도 있습니다. 젊은 감각을 유지하고 싶어 하는 40대를 가리키는 말로, 한때는 트렌디한 중년의 상징처럼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요즘은 젊은 세대에게 '청년 문화를 흉내 내는 어색한 중년'이라는 식의 조롱으로 쓰이기도 합니다.
이쯤 되면, 우리는 참 묘한 딜레마와 마주하게 됩니다. 경험을 고집하면 꼰대라 불리고, 젊음을 좇으면 영포티라 놀림을 받는 현실. 어떻게 행동해도 비판받기 쉬운 이 복잡한 구조 속에서, 기성세대는 어느 방향으로도 쉽게 나아갈 수 없습니다. 결국 '꼰대'와 '영포티'라는 정반대처럼 보이는 두 단어는 같은 질문을 품고 있습니다.
"기성세대는 이 시대를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사실 세대 간의 갈등은 인류 역사 속에서 계속 반복되어 왔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소크라테스조차 "요즘 젊은이들은 예의가 없다"고 말했을 정도니까요. 동양의 유학자들도 '군자의 덕목'을 되새기며 다음 세대를 걱정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갈등은 이전과는 조금 다릅니다. 과거의 갈등은 '권위를 어떻게 물려줄 것인가'에 가까웠다면, 오늘날의 갈등은 '그 권위가 과연 정당한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합니다.
젊은 세대는 더 이상 기성세대의 경험을 당연한 가치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을 다시 해석하고, 새로운 기준 위에 세우려 합니다. 전통을 고수하면 낡았다고 말하고, 새로움을 좇으면 가볍다고 합니다.
사회는 기성세대에게 계속해서 변화하라고 요구하면서도, 그 변화마저 조롱의 대상으로 삼기도 합니다.
그래서 때로는 '꼰대'라는 말도, '영포티'라는 말도 결국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기 위한 언어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이런 풍경 속에서 우리가 마주한 질문은 단순히 나이나 태도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결국 '나는 어떻게 존재할 것인가', '서로 다른 세대는 어떻게 공존할 수 있을까'에 대한 깊은 성찰을 요구합니다. 저는 꼰대로 살고 싶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억지로 젊음을 흉내 내는 사람으로 보이고 싶지도 않습니다. 제가 살아온 방식과 경험이, 누군가에게는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올 수 있다는 사실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런 질문을 조심스레 건넬 수 있는 사람이 되고자 합니다.
"그렇게 생각하시는 이유가 있을까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혹시 어떻게 느끼고 계신가요?"
이 단순한 질문들이야말로, 세대 간의 벽을 허무는 가장 강력한 언어일지도 모릅니다.
언어는 살아 있는 존재입니다. '꼰대'도, '영포티'도 언젠가는 그 의미가 바뀌고, 사라질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서로 다른 시간을 살아온 사람들이 마주칠 때 생기는 어색함과 긴장은 늘 존재할 것입니다.
그 만남 속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누가 옳은가'를 따지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의 말과 생각을 이해하려는 노력, 그리고 그 안에서 생겨나는 공감과 존중.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꼰대가 되지 않기 위해, 제 언어를 의심하고, 타인의 언어에 귀 기울이며, 익숙한 말 대신 새로운 표현을 배워가고자 합니다. 그것이 제가 이 시대를 살아가는 방식이며, 말의 주인으로 남고자 하는 이유입니다. 진정한 지혜는, 자신이 무지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그리고 진정한 소통은, 내 언어가 완전하지 않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데서 시작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