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의 가치를 가르쳐주는 부모
세상 ‘대부분’의 부모는 훌륭하다. 한 생명을 잉태하고 길러내는 여정은 그 옳고 그름을 따지기 이전에 위대하기 때문이다. 굳이 ‘대부분’이라는 단서를 붙인 이유는, 과거의 부모님들이 자신도 모르게 아이에게 상처를 주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이다. “옛날이야 애 셋을 방에 가둬두고 문 잠그고 밭일하러 갔지.” 삼 남매를 키우신 장인어른의 회상처럼, 그 시절 부모에게 양육은 생존을 위한 처절한 사투였다. 나의 어린 시절을 떠올려 봐도, 아버지의 이유 없는 감정 기복에 욕설을 듣거나 체벌을 당했던 기억이 선명하다. 참 잘해주셨던 기억은희미한데, 상처받은 기억은 왜 이리도 오래도록 가슴에 남는 걸까.
과거가 ‘무지’나 ‘생존’ 때문에 아이에게 상처를 줬다면, 지금은 역설적이게도 ‘너무 많은 정보’가 부모와 아이를 힘들게 한다. 쏟아지는 육아 정보 속에서 부모는 불안해하고, 그 불안은 고스란히 아이에게 전가된다. 이런 두려움은 저출산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아이 키우기 힘든 세상’이라며 출산을 포기하는 부부들이 늘고 있다. 이 지점에서 영화 《킹 리차드》 속 윌 스미스의 모습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는 빈민가 컴턴에서 다섯 딸을 키우는 아빠다. 열악한 환경이지만 리차드는 자신만의 확고한 철학으로 아이들을 양육한다. “우린 최고가 될 거야! 머지않아 너희는 백만 달러 수표를 받게 될 거고, 원하는 만큼 침대를 살 수 있을 거야.” 내가 주목한 것은 그가 내뱉는 말의 힘이었다. 비록 남들만큼 좋은 교육 환경이나 물질적 지원은 해주지 못했지만, 그는 아이들의 마음에 ‘사랑’과 ‘확신’의 씨앗을 끊임없이 심어주었다. 부모가 아이 앞에서 당당하게 헌신할 때, 비로소 아이들은 삶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의 가치’를 깨닫게 된다.
한동안 아내는 아이 머리를 묶어주며 매일 확언 메시지를 전해주곤 했다. 처음엔 나도 쑥스러웠지만, 덩달아 아이에게 긍정의 말을 건네기 시작했다. 어른도 삶이 흔들리는데, 하물며 아이들은 오죽할까. 자신의 능력을 의심하고 남과 비교하며 좌절을 겪는 순간, 아이를 지탱해 주는 것은 결국 ‘단단한 자존감’, 즉 존재의 가치다. 내가 아이에게 가르쳐 주고 싶은 것도 바로 이것이다. 남과의 비교가 아닌 자신의 가능성을 믿고, 스스로 삶을 개척해 나가는 힘. 영화 속 주니어 대회에 참가한 다른 아이들은 오로지 승리에만 목을 매며 패배를 부정하고 증오한다. 부모들 역시 결과만을 중시한다. 그 속에서 건강한 아이란, 승패를 떠나 노력하는 ‘과정’ 자체를 소중히 여길 줄 아는 아이다.
여전히 나는 ‘대부분’의 부모가 훌륭하다고 믿는다. 다만 우리가 아이에게 진정으로 바라는 모습이 단순히 무엇을 ‘잘’하는 기능적인 모습은 아닐 것이다. 아이가 스스로 자신의 가치를 믿을 수 있도록, 그 긴 과정을 함께 뛰는 페이스메이커 같은 부모가 되어야 한다. 무한 경쟁의 시대라지만 아이들마다 고유한 특성과 재능은 분명 존재한다. 이를 발견해 주고 지지해 주는 것이 부모의 몫이다. 영화 후반부, 리차드 역시 아이의 의견과 충돌하며 시행착오를 겪는다. 하지만 아이의 가능성을 믿고 과정을 함께 견뎌낸 그 현명한 아빠가 어떻게 그 매듭을 풀어갈지, 그 지혜를 우리도 눈여겨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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