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 캥거루는 태어나면 어미 주머니에서 최대 18개월까지 생활한다. 6개월 정도 자라면 바깥 생활이 가능하지만 겁이 많은 아기 캥거루는 잠깐 주변을 살핀 후 주머니 속에 쏙 들어간다. 아기 캥거루에게는 엄마 품이 가장 안전한 곳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청년 캥거루족 비율도 2022년 기준 59.7%이다. <이불 밖은 위험해> 노래처럼 청년들에게 밖은 만만하지 않다. 나 또한 그랬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릴 적에는 군대 갔다가 대학 졸업하고 직장 생활하며 모은 돈으로 결혼하고 가정을 꾸리는 것이 쉬운 일인 줄만 알았다. 하지만 이는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되지 않음을 고등학교 3학년 때 알게 되었다.
고등학교 3학년 시절 희망 학과를 예체능으로 선택하면서 인생에 파도가 세게 치기 시작했다. 쉽게 말해 인생이 조금 꼬이기 시작한 것이다. 지원했던 학교에 떨어지고 집과 가장 가까운 대학에서 1학년을 보냈다. 당시 미래에 대한 걱정보다는 20살이 되었다는 해방감에 많이 놀았다. 1학기당 성적표에 F를 한 개씩 맞을 정도였으니까. 이후 학교를 1년 다니고 군대를 갔다. 다행히도 군 생활하며 많은 책과 일기를 쓰며 진로에 대해 생각을 깊이 했다. 그리고 휴가 때 다니던 학교를 자퇴하고 원하는 대학에 시험을 보러 갔다.. 전역 후 창창한 미래가 펼쳐질거란 기대와는 달리 인생이 내 마음대로 흘러가지를 않았다. 개그맨 지망생으로 4년 넘게 시간을 보내며 자신감, 자존감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때 주변 친구들은 취직을 했고 명함이 생겼다. 명함이란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결과물과도 같았다.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지만) 20대 후반까지 번듯한 수익활동이 없었다. 제대로 말하면 수익활동을 해도 벌이가 변변치 않았다.
결국 오랜 시간 준비해온 개그맨 지망생 생활을 오랜 고민 끝에 포기를 했다. 포기 또한 용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학원 강사로 일하며 아이들에게 스피치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이때 주말마다 참석한 독서모임에서 아내를 만나 연애를 시작했다. 비록 파트타임 강사지만 아이들을 가르치는 나를 꽤 좋게 봐주었다. 인생을 살아감에 있어 정말 원하는 일을 이루지 못한 나를 응원하는 사람이 생긴 것이다. 학원에서 아이들 가르치는 일에 최선을 다했고 4년 만에 나만의 학원을 오픈할 수 있었다. 그리고 연애 4년 후 결혼을 하였다.
결혼 후의 생활도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집안일의 능력치를 떠나 가족을 만든다는 것은 책임져야 할 것이 많음을 선사한다. 그걸 몰랐다. 부모님께서 뚝딱해주셨던 모든 것들을 우리가 해야 했다. 연애 4년을 하며 알았지만 아내는 생각보다 많이 모든 것에 서툴렀고 고로 내가 해야 할 일이 많았다. 연애를 오래 했다지만 서로 생각하는 것이 달라 집안일 하나하나를 맞춰 가야 했다. 그런데 이게 참 쉽게 맞춰지진 않았다. 결혼 4년이 된 지금도 노력중인걸 보면 말이다. 우리가 결혼했던 2019년 12월 중국 우한에서 발병한 바이러스가 전 세계로 퍼져나가며 사망자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당시 우리나라는 아직 잠잠했던 상태였다. 2020년 2월 우리나라에서도 감염자가 나타나고 사망자가 발생하면서 분위기는 180도 달라졌다. 난생처음 보는 바이러스에 사람들은 불안해했고 일상을 마비 시켰다. 학교가 멈추고 온라인 수업 체제로 바뀌면서 학원도 문을 닫게 되었다. 운영하던 학원도 안전상의 문제로 원생들이 나오질 않았다. 코로나로 인해 전 세계가 위협을 받았고 우리 가정에도 빨간불이 들어왔다. 코로나19 감염보다 두려웠던 것은 매달 나가는 지출 내역이었다. 이제서야 제 노릇을 하려하다 학원 운영에 어려움이 생긴 것이다. 처음에는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발버둥을 쳤다. 하지만 코로나19 바이러스는 개인이 어떻게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다. 지금에서야 감기랑 비슷한 질병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이는 결과론적인 것이니까. 그때 당시에는 전 국민의 가장 큰 공포였다. 그 동안 모아둔 돈으로 하루하루를 버티다 6,000만 원의 대출을 받았다. 2020년 12월 3번째 학원 운영 금지 명령을 받았다. 한 달이라는 꽤 긴 시간이었다. 내가 어쩔 수 없는 상황을 1년을 겪다 보니 정말 힘들었다. 이때의 한 달은 우리 부부에게 주어진 마지막 긴 휴가라 생각을 하며 여행을 다녔다. 오히려 생각을 달리하니 마음이 편했다. 그렇게 2020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 선물 처럼 초롱이(태명)이가 우리에게 왔다. 어쩌면 코로나19가 여러 의미로 새로운 삶을 선물한 것이다.
아들에서 남편으로 그리고 아빠가 되었다. 아빠가 된다는 것은 생각보다 신비한 일이었다. 둘이 살다가 아기가 가족이 되는 것은 경험한적이 없었으니까. 아이에게는 하나 뿐인 좋은 아빠가 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노력이라기 보다 적응에 가까웠지만 말이다. 시간이 흘러 윤이가 3살이 되었다. 윤이는 종종 화장실에 따라와 볼일을 보는 내내 손을 잡아주기도 한다. 어느 날 문득 윤이의 목소리가 예뻐서 칭찬을 했더니 돌아오는 말이 가슴 뭉클하게 했다.
“아빠, 고마워”
그동안 살아오면서 좋은 아들, 좋은 남편, 좋은 아빠가 되려 노력했었다. 기준도 명확하지 않은 상태에서 좋은사람이 되려 하니 어느 하나 쉽지 않았다. 이제 좋은 아빠가 되는 방법은 알겠더라. 좋은 아빠란 일상에서의 순간을 함께 하는 것, 느낀 것을 표현 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무언가를 더 해줄지에 대한 생각보다 함께 하는 시간을 늘려 나가기로 했다. 이것이 육아를 하면서의 가장 큰 변화였고 글을 쓰는 이유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