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몽이 내 건강을 챙겨줬다.

퇴사 77일 전

by papeltina

오늘 악몽을 꾸었다.

원래도 꿈을 잘 꾸고, 잠도 종종 설치는 편이라 별일은 아니었지만, 오늘은 무섭다기보단 찝찝해 더 자고 싶지 않았다. 출근까지 아직 2시간이 남은 시간이라 토플공부를 좀 해볼까 하다가 우선 화장실부터 향했다. 한국과는 시차가 있어 자는 도중, 혹시라도 한국에서 온 연락이 없는지 화장실 안에서 핸드폰을 확인하던 게 어느새 버릇이 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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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온 이메일은 없었지만, 확인차 들어간 포털사이트 맨 앞부분에 '살이 빠지는 운동 황금시간대'라는 제목의 기사가 보였다. 논문을 쓰고 연구를 하는 입장에서 이런 유의 연구는 실험대상자의 숫자에 따라 결괏값이 극단적으로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손가락은 이미 그 기사를 클릭해 눈에게 정보를 전달하고 있었다.


'아침 6시~8시에 유산소 운동이 건강에 가장 효과적이다'


물론 '저녁 6시~8시도 그렇다'라는 논문도 기사에서 함께 언급하고는 있었지만, 결론은 '아침 공복에 유산소 운동이 좋더라'라는 것이었다. 미라클 모닝을 한다고 새벽 5시부터 일어나 설치다가 오후일정만 망쳐버렸던 경험이 누적되어 있는 나에겐 좀 반감이 들어 시큰둥하게 핸드폰을 꺼버렸다. 까만 핸드폰 잠금화면에 하필 6시 52분이라는 시간이 보였다.


토플을 위한 영어공부는 퇴근후로 미루고 주섬주섬 츄리닝으로 갈아입고 운동화를 신었다. 요즘 몸이 계속 찌뿌둥하고 쑤시길래 앞으로는 건강관리를 좀 하겠다며 '런데이'라는 어플을 설치한 지 한달 만에 처음이었다. 런데이는 러닝 챌린지의 종류를 선택하고 달성을 할 때마다 도장을 받는 식의 어플인데, 막상 운동을 하려니 귀찮고 하기 싫은 마음에 시작일만 차일피일 미루다 최근엔 거의 잊고 지냈던 참이었다. 세상 찝찝해 다시 잠도 못 들게 했던 악몽이 덕분이었다. (아님 어쩌면 영어공부가 하기 싫었던 걸 수도 있지만;;) 내가 어릴 때부터 그렇게도 피하고 싶어 했던 악몽이 이제는 내 건강을 챙겨준 셈이다.


9월의 프랑스는 이미 겨울을 준비해서 그런지 7시에도 어둑어둑하다. 30분의 조깅을 마치고 집으로 뛰어오는 동안에야 서서히 해가 뜨는지 하늘이 파스텔 핑크와 연보라로 얼룩덜룩 해지고 있었다. 떠오르는 해를 보며 러닝을 하면 삶의 의욕이 생긴다는 문장을 어디에선가 읽은 적이 있었는데 딱히 그렇지는 않았다. 다만 악몽의 찜찜함 만큼은 싹 씻겨 내려갔다. 몇 년 만에 하는 운동에 숨이 차고 힘이 들어서 그런 건지는 몰라도.


집으로 들어가면서 내일도 '혹시나 이 시간에 일어나게 된다면!' 30분 정도는 오늘처럼 조깅을 하고 출근하는 것도 좋겠단 생각을 했다. 곧 백수가 되면 게을러질지도 모르는데 그전에 습관을 들여놓으면 안전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도 있었고, 이참에 운동을 좀 해서 진짜 체력관리를 좀 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아직 아침 공복 러닝을 지금 진행 중인 영어시험 준비처럼 나의 목표로 지정할 수는 없었다. 다른 무슨 이유보다도, 내일도 오늘처럼 일찍 일어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괜스레 새로운 목표를 세웠다가 지키지 못하면 오히려 마이너스의 기분이 하루종일 가는 나는, 나의 본성을 거스르는 이러한 일은 쉽사리 다짐하지 않는다. 그러다 문득 오늘 밤에도 악몽을 꾸면 되지 않나 하는 자학적인 방법이 떠올렸다.

가끔 인생은 이렇게 가장 싫어하는 일이 나를 챙겨주고 발전시켜 줄 때가 있더라.

오늘, 악몽이 내 건강을 신경써주는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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