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 70일 전
망했다. 그냥도 아니고 완전히 망했다.
‘3주 3일 같은 소리 하고 있네’였다.
퇴사를 앞두고 자꾸만 쭈굴쭈굴해지려는 나에게, 단기간에 토플점수를 목표치까지만 좀 올려보는 것으로 용기와 자신감을 선물하고자 했건만.. 벌써부터 느낌이 온다. 실패의 쓴 맛이 추가될 것이라는 바로 그 느낌!
무언가를 계획하고 목표를 잡을 때, 결국 지키지 못했다는 바로 이 기분이 싫어 섣불리 행동하지 않는 편인데.. 이번엔 처음부터 작용했던 '퇴사'라는 의외변수를 고려하지 않았다. 내가 경솔했다.
동일한 환자샘플을 이용해 늘 해오던 실험을 하더라도 언제나 상황에 따라 변수는 존재하기 때문에 실험과정에선 주의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입이 마르고 닳도록 후배들에게 말하면서, 정작 내 일에서 이런 실수를 하다니. 학사를 포함해 13년째 이 일을 하는데도 삶 속에서 자연스럽게 적용시키기 위해선 아직도 많은 수련이 필요하구나 싶다.
그치만 변명보단 하소연에 가까운 얘기를 해보자면, 예상치도 못하게 나보다 먼저 퇴사를 하게 됐다는 팀원이 발생한 덕분에 인수인계를 받고, 정리를 도와주고, 논문 향후일정을 논의하고 하다 보니 이번주는 내가 퇴사를 앞둔 행복한 예비 백수라는 사실조차 잊고 지낼 정도로 정신이 없었다. 게다가 이 와중에 나의 보스는 일본에서 열리는 학회참석을 빌미로 'Amazing mother-son trip' (그녀의 SNS에 정말 이렇게 적었다!!!!)을 다녀온다고 2주간이나 자리를 비워 모든 결정과 책임을 내가 떠맡아야 했다.
프랑스에서 개인에게 주어진 휴가는 개인의 자유에 해당하기 때문에 누구의 잘못도 아닌 그냥 어쩔 수 없는 상황만 남은 것이라고 스스로 위안을 삼아보려 했건만! 막상 눈으로 저 단어를 목격하였을 땐! 급작스럽게 퇴사를 말한 팀원도, 이메일에 답도 없는 그녀도, 모든 것을 결정해야 하는 이 상황도 다 내던질 뻔했다. 하지만, 아직 나는 월급을 받고 있고(하... ㅠ), 퇴사일까진 70일이나 남았으며, 무엇보다 이 기관의 첫 한국인 직원이기 때문에, 후에 해외기관에서 일하고자 하는 한국의 후배박사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가능한 한 내 모든 에너지를 끌어다 나의 분노를 침묵시키는데 썼다.
지난 일주일 내내 나는, 시스템에 맞게 일처리가 진행될 수 있도록 팀원에게 퇴사 전 처리해주어야 할 것들을 '친. 절. 한 태도'로 요청하고, 응답도 않는 보스에게 어떻게 처리되고 있는지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뒤 '좋은 여행 되렴'이라는 인사말과 함께 이메일로 보내줬다. 그러다 보니 퇴근을 할 때쯤엔 이미 감정적 에너지와 멘탈에너지까지 탈진해 두뇌마저 푸다닥 푸다닥 거리며 당최 돌아가질 않는 상태가 되었다. 이 상황에서 나의 '완벽한 계획' 따위가 지켜질 리가 없지.
예전의 나는 상황이 이쯤 되면, 목표를 철회하고 조금의 환불이라도 받기 위해 최대한 빨리, 망설임 없이 시험을 취소했을 것이다. 이번에도 그러려고 했다.
그런데, 나의 oncogene (온코진; 암을 유발하는 능력을 가진 유전자를 일컫는 용어)을 작동시키는 팀원과 보스로부터 기분을 진정시키고자 닥치는 대로 읽어 댄 블로그에서 어느 이웃분의 글을 읽고 이번엔 다른 선택지를 골랐다. 망할게 뻔히 보이는 이번 토플 시험에서 도망치지 않기로 선택했다.
차분한 성격인 듯한 그분은 얼마 전에 토익을 봤는데, 업무일정이 바빠 퇴근 후 2주간 하루에 단어 500개씩만 꾸준히 외우고 시험을 보러 들어갔단다. 그리고 생각지도 못하게 700점 이상의 점수를 받았다고 했다.
물론 토익과 토플을 형식조차 다르고 그분과 나는 다른 기초실력을 가졌겠지만, 그 도망치치 않는 용기를 배워보고 싶었다. 왠지 그래야만 나의 퇴사가 쉽게 포기하는 내 성격에서 비롯된 도.망이 아닌 것에 스스로 떳떳할 것만 같았다. 나는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그분 덕에 혹시 될지도 모른다는 희망도 가져보고, 해본 적 없는 선택지를 택했다. 남은 2주 동안 단어라도 붙잡아 도망치지 않고 시험을 쳐 볼 요량으로 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아침 도착한 카드내역서에 '멍청비용'이 되어버릴 토플시험결제비는 여전히 내 마음을 푹푹 쑤신다.
나의 한 달 치 식비가 벌써 인사를 하며 구름뒤로 사라지고 있는 것 처럼 보였다.
잘 가.. 안녀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