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라니 May 13. 2024

너의 말

  

  너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이면 내가 한 말을 되짚어 본다. 왜 우물쭈물 댔을까. 안에 있는 네가 밖에서 온 내게 비 오느냐 묻는 말에도 온다. 안 온다. 명확하게 답하지 못한다.

  “안 오는 것 같은데 우산을 쓰고 다니는 사람도 있어요.”

  너는 “이따 오후에 비가 올까요?” 묻는데 

  “우산 가져왔어요.” 자꾸만 동문서답을 한다. 

  말이 제멋대로 툭툭 튄다.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주문하려는 내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는 듯 자신 이야기에 집중시킨다. 

  “맛있는 거 줄게요.” 

  “뭔데요?” 재빠르게 머리를 굴리는 게 보인다. 

  “아보카도요.” 분명 그렇게 말했지. 

  내 머릿속에는 검초록빛 껍질의 동그랗고 단단한 씨앗의 열매가 둥 떴는데 

  “아이스크림이 있어서요.” 

  아... 아보카도가 아니라 아포가토였구나. 너도 나처럼 말이 튄 걸까.


  "와! 땡잡았네요."라고 저렴하게 말한다. 땡잡았다니. 옛날 사람인 티까지 팍팍 낸다. 나는 좋아한다. 에스프레소에 아이스크림. 아포가토. 차라리 아메리카노 대신 아포가토로 주문을 바꿨다면 그날 그렇게 씁쓸한 맛으로 퇴장하지는 않았을까. 


  꽤나 집중해서 사랑의 기술을 읽다가, 너의 거래처 손님이 왔고, 너는 그와 이야기를 했지. 들려서 들었는데 둘의 대화가 진행되는데 나는 자꾸 찌그러들었다. 그리고 알 수 없이 토라진 상태에 빠져들었는데 이유를 모르겠는 거야. 네가 뭐라고 한 것도 아닌데. 오히려 너는 아이스크림 먹고 싶을 때 말하라고 귀띔도 해주었어. 거래처 사장님이 가져온 커피를 드립해 두 세 모금 주었고 너는 내게 맛을 물었지. 


  “심심해요”

  너는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어. 

  '식후에 가볍게 마시기 좋겠어요.' 분명 긍정적인 답변을 미리 준비해 두었는데 말은 또 엉뚱하게 엇나가버렸어. 말은 엇나가서 당황하는 모습을 보길 좋아하나. 말이 나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는다. 나를 곤혹스럽게 만들고, 나를 혼란에 빠뜨리고 있어. 말이 자꾸 꼬이는 느낌이라 더 있기가 거북했어.

 

  읽던 책도 더 집중이 안 되어 빈 컵을 들고 일어섰지. 너는 다급하게 "아이스크림 줄까요?" 물었어. 나는 고개를 저었고, 마치 토라진 티를 내듯이 말이야. 정말 그럴 이유가 없는데, 너무 오래 있었다며 가겠다고 했지. 너는 손님도 없는데 괜찮다며 더 있다가 가라고 했어. 나는 부득부득 가야겠다고 결심한 사람처럼 가방을 메고 카페를 나왔지.

 

  너는 이제 더 이상 내게 묻지 않아. 커피 맛이 입에 안 맞으시면 다른 걸로 드리겠다.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해 달라. 등등. 손님보다는 친구, 같이 대해주지. 난 그게 좋은데, 내 마음은 그 이상을 달리고 있는 걸까. 손님일 땐 지금의 상태를 원했는데 말이야. 뭐라도 기대했다가 실망한 사람으로 집으로 돌아오곤 해. 


  상대에게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상대에게 바라기만 하던 30대 시절의 연애. 마음 가득 주고 싶은 마음은 품고 있지만, 그만큼 움직이고 표현하지 못했던 때, 내가 품고 있는 애정의 양만큼 상대에게 바라기만 했다. 실상, 나는 한 게 아무것도 없었다. 준 것도 없었다. 나의 갈증은 아마도 내가 타인에게 주지 못하는 것에서 비롯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받지 못해서가 아니라.

 

  달달한 아이스크림을 먹었다면, 달달하게 집에 돌아올 수 있었을까. 먹지 않고 돌아 선 것을 조금 후회했는데, 봉지 과자를 사면 나오는 “다음 기회에” 따조가 떠올라. 꽝을 의미하지만, 오늘따라 희망으로 받아들여진다. 


  이제 말을 많이 하면, 목구멍 편도 쪽이 아려. 저릿해. 통증이 와서 침 삼킬 때 좀 거슬려. 목구멍이 있다는 것이 제법 의식되지. 귀 구멍도 자꾸 염증이 생겨서 딱지가 생기고, 콧구멍은 간질간질 비염이고, 튼튼하다 자부했던 목구멍까지 탈이 나네. 몸의 구멍들이 말썽이네.  


  말끝에 늘 드는 생각은 침묵. 말과 침묵은 한 몸인 것 마냥 그래. 오롯이 침묵하고 있다는 것. 나의 꿈은 침묵이야. 나를 아는 친구들은 말도 안 된다며 웃겠지만 말이야. 말도 안 되는 꿈이야. 혼자, 무궁화호를 타면 가능해. 같이 여행을 가더라도 기차에서만큼은 다른 칸 어때? 


  아포가토는 이탈리아어로 affogare '빠뜨리다', '익사시키다'의 수동형인 affogato에서 왔으며 (물 등에) 빠진 이라는 뜻이다. <출처 : 다음 사전>


 나는 맞춤법 검사를 돌리기 전까지 '아포카토'로 표기하고 발음해 왔다. 아포가토. 아포가토. 거듭 말해보아도 에스프레소에 빠진 아이스크림은 떠오르지 않는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