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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라니 May 23. 2024

나의 집

마중 나오는 집

  머물지 않고 떠도는 삶을 꿈꿨다. 익숙한 집에서의 편안한 잠보다는 낯선 여행지에서의 미지의 꿈을 원했다.  집은 안정과 정착을 의미했다. 안정과 정착을 거부해 온 나에게 집은 떠나기 전에 잠시 머무르는 곳에 불과했다.  


  대학 입학 전 20년 가까이 부모님과 한 집에서 살았다. 대학 입학 이후 20년 정도 부모님과 따로 살았다. 혼자 살기도 했고 친구와 함께 살기도 했다. 여차저차 마흔둘이 되어 다시 부모님 집으로 들어와 살게 되었다.


  오래전에 지어진 촌집이라 외풍이 심해 춥고, 주방에는 볕도 안 들었다. 통풍과 방음도 잘 안 되었다. 그런데 살다 보니, 욕조에 몸을 담글 수 있고 마당에서 볕을 쬘 수 있어서 좋다. 

 

  심부름 갔다가 집에 돌아가는 길이면 절로 걸음이 빨라진다. 좀 더 빨리 집에 도착하고 싶은 마음. 가방 속에 똑순애가 좋아하는 명란젓과 급한덕이 좋아하는 식빵이 들어 있어서겠지. 빨리 가방을 열고, 이거 사 왔다!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앞서 서겠지. 


  나 오는 걸 알고 집이 마중을 나온다. 이제야 정말 집에 가는구나. 여태껏 집이 아닌  방에만 살았다. 처음으로 집에 돌아간다는 자각을 했고 울컥했다.  마흔 넘도록 방을 구하느라, 또 구한 방에서 사느라 마음고생도 참 많았다. 


    부푼 꿈은 아니고 꼬깃꼬깃 접어 둔 꿈을 안고 대학교 입학. 방 세 개 중 한 칸을 월세 내어  같은 과 지읒 언니와 함께 살았다. 옆 방에 살았던 미친 쉐리. 이름이 용 뭐였는데 갑자기 나 혼자 있는 방에 그가 들어왔다. 혀를 밀고 들어왔고, 나는 이빨로 혀를 응징했다. 그는 그 후로 나를 쫄쫄 따라다니며 고백했는데, 오래 사귄 여자 친구가 있는 몹쓸 놈이었다.  


  나는 함께 살던 지읒 언니를 잘 따랐다. 언니는 창의적인 요리 솜씨로 나를 놀라게 했다. 짜파게티에 콩나물을 잔뜩 넣어서 끓였다. 비린 맛을 예상했지만, 아삭한 식감이 살아있는 끝내주는 짜파게티였다. 입이 짧았던 나는 언니를 만나고 식탐이 생겼다. 먹는 게 즐거울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언니와 살면서 7킬로그램 정도 살이 쪘다.  언니와 함께 하는 대학 생활은 늘 예측불가였다. 언니는 소설을 잘 썼는데 언니와 함께 있으면 소설 같은 재미있는 사건이 생겼다. 내가 포기한 숙제를 언니가 내 글씨체를 흉내 내서 대신해놓기도 했다. 마음을 참 많이 주었는데 언니는 어느 날 갑자기 쪽지 한 장만 남기고 사라졌다.

  

  며칠 동안 정말, 엄마 잃은 아이처럼 울어댔다. 도저히 혼자서는 살 수 없을 것 같았는데 그 방에서 계약기간을 마쳤다. 지읒 언니에 대한 기다림은 방을 떠나서도 계속되었다. 하나 그리울 게 없는 방인데도, 지읒 언니와 함께 지냈던 공간이라 애틋함이 있다. 가족 아닌, 타인과 처음 살아본 경험이 추억이 되어 마음에 깊이 남아 있다. 


  나의 경우 함께 사는 것도 혼자 사는 것도 쉽지 않다. 사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걸지도 모른다. 함께도 살아보고 혼자도 살아 본 결과, 누군가와 함께 살았던 기억만 줄줄줄 떠오른다.  



  난생처음으로 잠시 머무는 게 아니라 계속 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제주에 갔어. 제주에 디딘 첫 발. 마치 험난한 섬 생활을 예고하는 것처럼, 거친 바람이 사방에서 마구잡이로 나를 때려댔어. 바다에 펼쳐진 검은 돌은 무척 차갑고 음산했어. 


  깨끗하고 넓고 전망 좋고... 아쉬울 게 하나 없는 너의 보금자리. 육지 생활을 정리하고 섬 생활을 시작할 때, 네 집에서 하룻밤을 묵었었잖아. 몸을 푹 누일 수 있는 큼지막한 소파. 곳곳에 너의 작품이 걸려있어서 더욱 빛났던 거실. 정갈한 너의 집이 좁은 자취방만 전전하던 나와는 너무도 달라서 한동안 얼떨떨했어. 너는 좁다고 했지만 너만의 작업 공간이 있다는 게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어. 게다가  1004호라니.  


  그로부터 5년 뒤, 제주 생활을 정리했어. 아쉽다기보다 빨리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앞섰어. 제주를 떠나기 한 달 내내 일몰을 보러 다녔어. 일몰 여행을 끝내고 엄마 아빠가 있는 순천으로 왔지. 행거, 책상 놓으면 누울 자리만 딱 남는 내 방. 그 방에 누워서 제주를 떠올리며 끄적였어.


왔어지나야

  

  이곳에 오기 전까지 일몰을 자주 봤어. 일몰을 보다 보면, 마음이 정해질 거라고 생각했어. 마음이 뭔가 말할 때까지 기다려 보는 것. 내가 유일하게 잘하는 일. 마음도 닳고 닳아 사라진 걸까. 마음은 닫혀있었어. 


  되고 싶었던 사람은 말라 바스러지고, 희망은 이미 침몰했고, 사랑에게는 머리채를 붙잡혔어. 부끄러운 짓을 한 사람처럼 어딘가로 자꾸 숨고 싶었는데 자꾸 발각되는 기분이었어. 모든 게 다 내 잘못인 것만 같았을까. 


  일몰이 시작되면 사람들은 사진을 찍으면서 일몰을 바라보다가 일몰이 끝나면 사람들은 우르르 자리를 떠. 해가 지고 나면 순식간에 온도가 떨어지고 어둠이 풀려나. 둘러보면 나만 남아있어. 나는 무얼 더 보고 싶어서 더 있는 걸까. 굶주린 마음이 어둠과 뒤섞여 허기만 남았어. 허기진 마음이 물어. 

 

  어디로 가지? 


  묻는 게 아니야. 너는 갈 곳이 없어,라고 단정하는 거지. 허기진 마음에는 차라리 순응하는 게 나아. 갈 곳이 없어. 좀 더 버티면서 찾아보았다면 어땠을까? 한 동안 다른 곳에 있었더라도 다시 이곳으로 왔을 것 같아. 


  돌아보면, 내가 원해서 있다는 착각. 착각이 없다면 삶을 놓아버리기 얼마나 쉬울까. 결국은 갈 곳 없는 빈 마음이 그곳으로 이끌었는지도 모르겠어. 정착하고 싶었던 곳에서 제일 많이 떠돌았어. 사랑이 오길 간절히 바랐던 마음. 극심한 외로움을 느꼈지. 나는 집도 사랑도 먼 일이라고 생각했어. 먼 일은 어느 정도 희망적이야. 방이 아닌, 집으로 돌아가는 기분이 어떤지 알지 못해. 내게는 아주 먼 집이 있어. 

 

  전혀 다른 이름인데 네 이름을 들었을 때 동질감과 반가움을 느꼈어. 라니. 지나. 받침이 하나도 없는 이름이라서? 네 이름을 듣는데 마음에 바람이 일었어. 나중에 알았어. 공통점. 너도 나도 자신이 원하는 이름으로 개명했다는 것. 남이 아닌 자신이 지어 불리는 이름. 널 잘 모르지만 알고 싶었어. 

 

  마음속으로 부르는 상대가 있고, 그 상대에게 말 걸다 보니 편지가 된다. 너에게 무수히 많은 편지를 보내게 될 것 같아. 해가 진다. 지나야. 나는 여기 잘 도착했어.


  “잘 왔어요.”

  겨울이 끝나갈 무렵 라니가 왔다. 떠돌다 온 바람 냄새. 당분간 신세 좀 지겠다며 짐 가방을 지나 방에 내려놓았다. 2박 3일 정도 머물다 갈 사람처럼 짐 가방은 단출했다. 내일 아주 오래 잘 수도 있으니 걱정 말라했다. 씩씩했지만 지쳐 보였다. 오랫동안 방에 보일러를 돌린 적이 없었는데 방바닥을 만져보니 다행히 훈기가 돌았다. 


  “새벽에는 추워요. 2도 놓고 자면 딱 좋아요.”

  장롱 안에 쟁여 두었던 전기장판을 꺼내 가져다주었다. 

  “네. 고맙습니다. 언니도 안녕히 주무세요.”

  “어. 그래. 그래요.” 

  

  라니는 지나의 친구였다. 동생 없는 방에 친구가 와 있으니 이상했다. 라니의 발목 없는 얇은 양말이 눈에 들어왔다. 발 시리겠네. 나보고 언니라고 했나... 잠들 기 전까지 언니, 소리가 계속 맴돌았다. 지나의 방에 불이 꺼졌다. 지나는 나를 언니라고 부른 적이 없었다.

 

  지나의 방은 혼자 눕기 딱 알맞았다. 창 옆에 오래된 나무 책상이 하나 있고, 책꽂이에는 스무 권 정도의 책들이 뉘어져 있었다. 책상 옆에는 옷걸이 하나, 차 마시기 좋은 작은 테이블 하나가 전부였다. 책상 뒤로 공간이 있어서 보니 기타가 세워져 있었다. 


  바로 잠들 거라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정신이 또렷해졌다. 테이블 위에 놓인 보온병이 보였다. 물을 한 잔 따라 마셨다. 따뜻한 물이 들어가니 몸이 노곤해졌다. 오래오래 자고 싶다.


  지나는 머물 곳이 필요한데, 갈 곳이 없다면 들르라고 이곳을 알려줬다. 언니한테는 자신이 이야기해 두었으니 아무 때나 가도 괜찮다고 말했다. 늘 그렇듯 지나의 무심한 엉뚱함 정도로만 받아들이고 금세 잊었다. 그때는 정말 이곳에 오게 될 줄은 몰랐다. 6년 만에 이곳이 생각났고, 일순간 느껴진 안도감이 이곳으로 오게 만들었다. 


  그동안은 살아 보고 싶은 곳도 늘 생겼고, 그런 기회들도 멈춤 없이 이어졌다. 맛있게 폭신폭신 부풀어 오른 상태였다. 무엇이나 될 수 있고 따뜻하고 활기찬 풍미가 도는. 그런 상태일 때 지나를 만났다. 지나는 동물보다 식물에 가까운 사람. 나무 같았다.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지나를 만나고 집에 돌아오면 책을 두 챕터쯤 읽다가 온 느낌이었다. 혼자 시간을 보내고 온 것처럼 아무 일 없기도 했고, 책 속 한 장면처럼 새삼 떠올려 보기도 했다. 무언가 평온해졌다. 


  지나를 만나면 표정 없던 얼굴이 나로 인해 환하게 펼쳐지는 게 좋았다. 지나는 내가 사람들 걸음걸이를 흉내 내는 걸 좋아했다. 지나의 웃음 덕분에 나는 사람들의 걸음걸이를 열심히 관찰하는 습관이 생겼다. 걸으면서 만들어내는 특유의 리듬을 포착하고 살짝 과장하는 게 포인트였다. 한마디로 걸음걸이의 캐리커쳐. 생각보다 걸음걸이에는 많은 것이 담겨있음을 알았다. 말하지 않아도 보이는 것 중 하나가 걸음걸이였다. 지나가 가장 열광적인 반응을 보였던 사람은 3년 정도 만났던 남자친구였다. 그의 걸음걸이는 춤에 가까웠다. 땅을 밟고 걷는 다기 보다, 폭신한 매트리스 위를 걷는 것처럼 덩실덩실 경쾌했다. 보고 있으면 들뜨면서도 묘하게 우스꽝스러웠다. 

 

  지나는 함께 걷다가 불쑥 전 남자 친구의 걸음걸이를 보여 달라고 아주 쓸쓸한 표정으로 주문했다. 웃기로 작정한 사람처럼 손뼉까지 치면서 웃었다. 지나의 웃음은 음소거가 된 장면과 흡사했다. 꽃도 그렇게 피지 않나. 소리 없이 활짝 웃으면서. 나는 요란스럽고 특이한 웃음소리 때문에 튀는 사람이었다면 지나는 꽃처럼 소리 없이도 활짝 웃는 사람이었다. 아마도 우리는 전 남자 친구의 덩실대는 걸음걸이 덕분에 급속도로 가까워졌을 것이다.

 

  한밤중에 나는 왜 전 남자친구의 걸음걸이를 흉내 내고 있는 걸까. 여기 지나의 방에서. 잘 안 되는 거 같아서 자꾸 한다. 혹시라도 지나가 본다면 웃을 때까지. 


  내 주특기. 시작만 하다 멈춰버린 이야기. 그래도 너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였어. 살면서 이러 이러한 집에 살고 싶다는 꿈을 꿔본 적이 없어. 집 생각만 하면 턱턱 막히는 느낌. 그냥 살았지. 공간을 꾸미면서 살아본 적도 없어. 제주 살 때 큰 마음먹고 책상과 의자를 샀는데 누워서 바라보기만 했어. 집에 애정을 준 적이 없는데 그게 나 스스로를 사랑하지 못했기 때문은 아닐까... 싶어. 그래서 그렇게 굶주린 사람처럼 떠돌아야 했는지도. 


너의 집 1004호는 잘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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