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어오는 제비꽃

by 고라니

<제비꽃 관찰일>

1차 : 2024. 10. 30

2차 : 2024. 12. 10


붓을 놓았을 때, 아쉬움이 컸던 제비꽃 그림이 좋아져서 계속 보고 있다. 왜 좋아진 건지 이유를 잘 모르겠다. 마음은 정말 오락가락. 제멋대로다. 내 마음인데도 알기 어렵다. 아쉬움은 좋아하기 일보 직전의 감정인가.


시골집에 와 살면서 달리 보인 제비꽃. 3월 중순.이웃집의 담벼락 아래 제비꽃 수 십 송이가 올망졸망 무리 지어 쭉 피어있었다. 시멘트 바닥 좁은 틈에서 작고 아름다운 생명이 나고 살 수 있다는 게 놀라웠다. 여리여리한 꽃잎들이 천진함과 강인함이 한 몸이다. 연보랏빛 제비꽃이 피어 있을 뿐인데 낡은 진회색 담벼락이 환해졌다. 물론 내 마음까지도. 꽃샘추위에도 끄떡없었다.


봄에만 핀다고 생각했던 제비꽃을 지난해 10월 말에도 보았다. 늘 오가던 길 보도블록 틈에서 느닷없이 제비꽃과 맞닥뜨렸다. 10월에도 제비꽃이 피는구나. 누구에게도 밟히지 않고, 무사히 열매 맺기를 기도했다. 가만 보니


어떤 곤충이 바닥을 기어가다가 잠시 멈춘 모양으로 잎이 나있다. 잎 한 장 한 장이 다리처럼 보였다. 상상력이 발동된다. 제비꽃을 등에서 꽃 피운 한 마리 곤충. 강한 역동성이 느껴졌다. 그 어떤 동물보다.

식물이 식물로만 있지 않는구나. 식물의 무한한 가능성을 목격한 것처럼 내가 밝혀낸 비밀인양 눈이 빛나고 가슴이 동동 설렜다. 즐겁게 춤을 추다가 그대로 멈춘 형상. 식물은 생물 중에서 동물과 구별되는 한 일군으로 정의하는데 지금 내가 본 제비꽃은 굳이 동물과 식물을 구별할 필요가 없었다. 논리적으로는 설명이 안 되지만 무언가 벅차올랐다. 인간이 생명을 언어로 구분하고 규정짓는 층위들의 한계가 부숴진 현장에 초대된 것 같았다.


어적어적 기어가는 움직임이 살아있는 제비꽃을 그리려고 노력했다. 연필 스케치를 마치고 나서 내 야망이 너무 컸음을 깨달았다. 색을 칠할 때는 이미 자포자기. 내가 원하는 그림이 아닌데, 에라. 모르겠다. 갸우뚱, 시큰둥하며 끝까지 완성은 했다. 아쉬운 점 투성이었다. 완성 후 몇 시간이 지나서야 제비꽃이 매력적으로 보였다.


실물에는 못 미치지만 마음을 담아서 그렸기 때문이지 싶다. 결과와는 상관없이 그 마음이 제비꽃 그림을 보는 내 관점을 바꾸어 놓았는지도 모르겠다.


계속 그려보라고, 그려 달라고 내가 그린 제비꽃이 내게로 기어 기어 기어 와 기어이 응원하고 있는 건 아닐까.


내 기도가 통했을까. 2024년 12월 10일, 제비꽃이 피어있던 자리에서 이미 씨앗이 빠져나간 벌어진 세 개의 꼬투리와 아직 씨앗을 품고 있는 제비꽃 씨앗 주머니를 보았다. 누렇게 뜬 잎들 사이로 아직 연두빛을 내고 있는 연한 잎은 싱싱했다.


다가올 봄, 가을 제비꽃 피었던 그 근방을 걸을 때면 발밑을 살피며 걷겠구나.


keyword
작가의 이전글겨울 털머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