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 자판기_07

두더지의 고민, 김상근 글.그림

by 고라니

쌓인 눈이 없을 때도 눈덩이를 굴리고 싶어지는 그림책

두더지의 고민 / 김상근 글, 그림 / 사계절

겨울에 딱 맞는 그림책을 (조카) 이준이에게 읽어주고 싶어서 고민하며 도서관 서가를 돌았다. 나의 고민을 날려준 고마운 그림책. 그림책 표지만 보고만 있어도 뭔가 마음이 몽골몽골 해진다. 캬~ 입안이 시원 달달해지는 유자민트티를 한 모금 마신다.


김상근 작가의 사랑스러운 그림책 '두더지의 고민'과 '두더지의 소원' 두 권을 품에 안으니, 이 겨울 두두두두! 두려울 게 없다. 두더지는 나에게 상상의 동물에 가깝다. 실물로 두더지는 본 적이 없다. 그게 늘 아쉽다. 흙과 동떨어진 삶이라 그렇겠지. 아빠가 땅콩이나 고구마가 잘 안 되면 두더지 탓을 하는 걸 들었다. 그때마다 나는 아빠 얼굴이 두더지와 닮았다고 느낀다. 이준이에게 그림으로나마 두더지를 보여주고 싶었다.


김상근 작가는 두더지를 실제로 본 적이 있을까.

왜 두더지를 주인공으로 설정했을까.


표지 그림을 보면 두더지 머리, 콧잔등, 가방끈을 쥔 장갑 위에 흰 눈이 소복하게 내려앉아 있다. 검은 점 하나가 두더지의 눈이다. 표정을 읽어내기 쉽지 않다. '두더지의 고민' 제목 위에도 눈이 쌓여있다. 제목을 읽고 나면... 과연 두더지의 고민이 무얼까. 더욱 궁금해진다.


나의 유년 80퍼센트 이상은 겨울과 눈이다. 겨울이 기나긴 태백에서 태어났다. 내 아버지는 물론 친구들의 아버지 대부분은 탄을 캐는 광부였고, 탄광촌 태백. 20년을 일한 아빠의 손톱과 눈 점막은 까맸다. 스러질 듯 아슬아슬하게 지어진 집들의 검은 외벽과 그 아래를 흐르는 시냇물이 검다. 실제 기억인지 그림을 본 것인지 희미하다. 눈은 하얗고 반짝이지.


눈이 정말 자주 많이도 푹푹 왔다. 등굣길, 하굣길에 버스가 안 와서 오래 기다리는 와중에도 눈을 탓하거나 원망하지 않았다. 그저 버스가 가장 먼저 보이는 곳에 하염없는 시선을 두었다. 버스를 기다리던 사람들은 발을 동동 구르는데도 나는 놀랄 만큼 차분했다. 눈이 좋았다.


아무도 밟지 않은 눈길을 걸으며 몰래 눈을 먹었다. 누군가가 걸은 발자국에 내 발자국을 포개며 누군가의 길을 따라 걷기도 했다. 내리는 눈을 보며, 이 눈은 잘 뭉쳐지는 눈이군, 아니군. 판별하기도 했다.


특히, 밤의 가로등 아래서 내리는 눈을 보는 걸 좋아했다. 가로등 아래서에 눈을 보면 눈은 내리는 게 아니라 밤하늘로 솟구쳐 빨려 든다. 마치 밤하늘이 눈을 흡입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우주'라는 단어를 실감했다. 눈은 시간을 잊게 했다.


'두더지의 고민'은 시작부터 끝까지 좋은 그림책이다. 두더지의 고민이 무얼까. 생각하며 읽기 시작하지만... 다 읽고서 "어? 두더지의 고민이 뭐였지?" 다시 처음 질문으로 돌아간다. 두더지의 고민을 깡그리 잊을 만큼 재미있다. 두더지와 함께 작은 눈덩이를 점점 더 크게 굴리다 보면 그림책에 푹 빠져버린다. 고민 따위가 껴들 틈이 없다.


서울에 큰 눈이 왔을 때, 같은 고향 친구인 명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말했다. "눈이 푹푹 쌓이는데 장갑도 안 끼고 눈덩이를 굴렸어. 정말 잘 뭉쳐지는 눈 알지? 눈덩이를 너무 굴리고 싶었어." 아이들이 신나게 눈놀이 하는 영상을 찍던 친구가 휴대폰을 놓고 눈덩이를 굴리는 모습을 상상하니, 몹시 부러워졌다. 내가 사는 순천은 눈이 오지 않기로 유명한 곳이니까.

나는 왜 아직도 눈만 오면 가슴이 뛸까.

눈덩이 굴리기는 왜 어른이 되어서도 하고 싶나.


눈이 펑펑 내리는 겨울밤, 두더지는 혼자 눈덩이를 굴리며 "나는 왜 친구가 없지?" 고민한다. 고민을 말하며 눈덩이를 굴리는 동안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혼자에서 여섯이 된다. (과정을 말하면 스포일러) 커지는 눈덩이 속도만큼 독자가 그림책을 보는 재미도 점점 배가된다.


개구리, 토끼, 여우, 돼지, 곰_다른 동물 친구들도 사실은 두더지처럼 친구를 기다리는 장면은 안심을 준다. 나 혼자만 친구가 필요한 게 아니라 사실은 모두가 그렇다는 감각.

두더지가 땅을 파는 건 생존과 밀접하지만, 자신이 굴린 커다란 눈덩이 속으로 망설임 없이 "푸스슥, 푸스슥"(두더지의 고민, 인용) 파 들어가는 건 위험에 빠진 목소리를 구하기 위한 모험이며 용기다. 결국, 두더지의 혼잣말은 친구들과의 대화로 이어지고 두더지의 고민은 모험과 놀이가 된다.


당신은 눈덩이를 굴리고 싶나요?

당신의 눈덩이 속에는 어떤 친구들이 있나요?


어른이 된 후, 새로운 친구 누구를 사귀었나. 몇 없는 데다 지금까지 만나는 친구는 거의 없다. 그럼에도 나는 어딘가 낯선 장소에 가면 새 친구가 생길지 모른다는 기대를 품는다. 혼자라도 계속 눈덩이를 굴리는 것이다. 혹시라도 나처럼 혼자 눈덩이를 굴리는 이를 만나 서로의 눈덩이를 함께 쌓아 올려 눈사람을 만들 수도 있지 않을까. 노는 상상을 펼친다.


눈사람은 그 자리에 있다가 (친구가 남지 않듯이) 녹아 사라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날의 눈사람은 소중하다. 실체는 사라졌을지라도 눈사람은 내 손끝에 살아있다. 다시 눈이 내린다면... 눈을 뭉치고 부지런히 굴리겠지. 만약, 아무도 나타나지 않는다 해도 내가 굴린 눈덩이가 곁에 있지 않나.


두더지 할머니 말씀을 귀담아 들어보자.

"얘야 고민이 있을 때는 눈덩이를 굴려 보렴."


두더지가 고민만 하고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면? 두더지는 할머니 말대로 눈덩이에게 고민을 말하며 계속 굴린다. 하늘에 닿을 듯 어마어마하게 커진 눈덩이는 고민의 크기라기보다 친구를 원하는 간절함으로 다가온다.

'두더지의 고민'을 읽고 나니 눈덩이를 너무너무 굴리고 싶어서 고민이다. 눈이 오지 않는 날에도 눈 이야기는 겨울을 나는데 꼭 필요하다. 눈덩이는 눈에 대한 애정표현, 이 리뷰는 그림책 ‘두더지의 고민’대한 애정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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