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달려왔어.
달리기라니, 세상 모든 운동을 못하는 내가
달려왔어.
비틀비틀 뒤뚱뒤뚱거리며 뛰어왔어.
아직 더 달려야겠지.
이것이 레이스라면 말이야.
그런데 나는 이제 여기서 더 안 뛰려고
그냥 걸으려고 해.
나는 겁이 많고 눈물도 많아.
걱정 근심이라면 어디 가서도 지지 않을 만큼 많이 가졌어.
긍정이가 날뛰는 세상에서
얼마나 근원적인 '부정적 생각'을 가졌는지는
숨겨두고 싶지만 잘 숨겨지지 않았을 거야.
그래, 나는 걱정 근심, 슬픔, 우울, 이런 마음들을 아끼고 보살펴 왔어.
소중했으니까.
그것들은 작고 여리고 걸핏하면 울고,
또 내게는 늘 친밀했으니까.
난 그것들이 사람이 가질 수 있는 가장 아픈 마음이라고 생각했어.
그 정도가...
그런데 나는 바 보였던가 봐.
내가 나이를 헛먹었다고 했잖아.
나는 이제야,
허무와 공허를 만났어.
그래, 열심히 달려오다 두더지 굴에 퐁 빠져버렸지.
아, 이런 함정이 있을 거란 걸 왜 몰랐지?
삶이 내게 이런 것도 줄 거란 걸 왜 몰랐지?
놀랐어.
이런 것도 있구나.
걱정과 근심, 우울과 슬픔은 허무와 공허에 비할 수 없었어.
아, 나는 여기까지인가 싶어졌어.
나는 약한 인간이니까.
내가 얼마나 더 견딜 수 있을까?
견디고 싶지도 않았지.
그렇게 허무와 공허가 내 양손을 하나씩 쥐고
나와 지내기 시작했어.
나는 그런 애들을 후딱 쫓아내지 못하거든.
익숙하고 친밀했던 조무래기들과 닮은 그들이
내 손님이라는 걸 나는 잘 아니까.
그리고 나는 거짓 긍정으로 그 애들을 나가라고 하고 싶지도 않았어.
이제 집은 왁다글해졌어.
걱정 근심, 우울 슬픔은 구석구석 어디론가 숨어버렸어.
허무와 공허가 부풀어 났으니까.
그래도 모두 한 집에 살고 있지.
나는 그 애들을 싫어하지 않아.
나쁜 친구들이라고도 생각하지 않지.
분명 어느 책갈피 속에선가 내가 키우고 있던 마음들이었을 거야.
그럼, 여기서 끝이냐고?
아니야, 그렇지 않아.
그럼, 다음 편지에서 또 만나.
나의 미래, 나의 지금.
좋은 밤 보내고, 잘 자고
내일 아침에 만나.
언제나 많이 많이 사랑하고 있어.
너의 수고를 내가 잊지 않아.
2024 12 06 금
너의 어질고 지혜로운 지현으로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