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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트너 Feb 19. 2022

파레이돌리아_06

단편소설

정근이를 만나면 둘에 한 번은 오락실에 갔다. 오락을 참 좋아하는 아이였다. 조이스틱을 쥔 손은 민첩하고 버튼을 연달아 누르는 손가락의 움직임에는 확신이 있었다. 손 쓰는게 아주 서툰 나로써는 어떤 게임을 하든 그를 상대할 때 마다 맨 손으로 절벽을 올라야 하는 상황에 봉착한 기분이었다. 정근이는 대전 액션 게임을 가장 좋아했는데 이는 참 고통스러운 장르였다. 우선 컴퓨터가 레버의 움직임을 어떻게 감지하는지에 대한 감각이 전혀 없어서 우-하-우하 방향으로 움직여야 하는 대공기 류의 필살기를 구사하지 못했으며 상대방의 움직임에 대한 예측도 하지 못했다. 어쩌다 내가 이기고 있는 순간에는 상대방과 나의 남은 에너지바를 쳐다보다가 승리할 수도 있겠다는 사실 자체에 신경을 빼앗겨 떨거나 굳었고, 과연 패배하곤 했다. 차라리 그가 이기고 내가 지는 게 좋았다. 정근이가 이겨서 나를 보며 업수이 여기듯 웃고 장난치다가 결국 나를 끌어안는 흐름이 좋았고 그럴 때면 내가 그의 자장안에 있다는 생각에 만족을 느꼈다.



대전 액션 게임은 주로 두 명 정도의 남성 캐릭터가 메인인데 정근이는 언제나 메인 중 하나를 골라 플레이 했다. 반면 개성이 넘치거나 자극적인, 평범함이라고는 도무지 찾아볼 수 없는, 열에 한 두명 꼴로 존재하는 여성캐릭터는 나의 몫이었다. 아버지와 함께 첨탑 정비를 마치고 이틀 뒤 정근이는 내 어깨를 붙들고 오락실로 향했다. 언제나처럼 그가 좋아하는 게임을 하기 위해 동전 두 개를 넣었고, 1P에 그가 2P에 내가 앉아 조이스틱을 붙들었다. 아무 생각이 없었다. 대점프로 다가가 킥을 날려야겠다거나 연속 콤보를 써먹어야 겠다는 판단 따위 하지 않았다. 곧 패배하여 나의 캐릭터가 내지를 날카로운 비명소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그 날 처음으로 정근이를 이겼다. 두 번 해서 모두 이겼다. 게다가 첫번째 판은 내가 한 대도 맞지 않고 퍼펙트로 승리했다. 너무 생경한 순간인지라 몇 초간 반응하지 못하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리고 정근이의 눈치를 봤다. 쾌활하게 웃으며 정말 자신이 진 게 맞느냐고 호들갑을 떨었다. 기분이 좋아서 그러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냥 화를 내자니 뭔가 속 좁아보일 것 같고 가만히 있자니 기분이 불쾌한데 웃으면 대충 상황을 뭉갤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랬을 것이다. 어린 정근이는 그렇게 밖에 할 줄 몰랐을 거다. 나는 이기고도 미안했다. 정근이는 다른 게임을 하겠다며 자리를 떴다. 언제나 동전을 가지고 다니는 녀석인데 이상하게 돈이 없다며 나에게 이백원을 빌려갔다. 혼자 할 수 있는 게임이 없었던 나는 인기 없는 게임들이 몰려 있는 구석자리로 가서 퍼즐이나 퀴즈를 푸는 게임을 했다. 서로 다른 게임을 따로 앉아 한 적이 거의 없어서 어색했다. 



일부러 정근이의 곁에 붙어 함께 귀가했다. 그에게 교회나 성경, 신앙이나 첨탑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을리 만무했다. 바닥을 기어다니는 곱등이가 누구 발을 건드리나 바라보는 일이 얼마나 재미있는지 조금도 공감할 수 없을 것이라 믿었다. 그 모든 것들이 정근이와는 남극과 북극만큼이나 멀어보였다. 아무 말 하지 못하고 옆에서 정근이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오락실에서의 승리가 생각났고 난 이유도 없이 뭔가 무서워졌다.


- 너 집에 가면 뭐할거야?

- 삼국지 무장쟁패.


그가 컴퓨터로 종종하는 대전 액션게임이었다. 정근이는 별안간 집에 가서 같이 게임하고 라면 끓여먹지 않겠냐고 내게 물었다. 나는 무장쟁패 게임을 정말 형편없이 못했었다. 하지만 결국 그의 집에 따라가게 되었고, 대충 열 번정도 해서 열 번 정도 진 다음 그가 끓여주는 라면을 먹고 같이 침대에 누워 만화책을 보며 놀았다. 정근이 기분이 훨씬 좋아보였다. 만화책을 한참 보던 몹시 조용하게 잠이 들었다. 배꼽을 내놓고 자고 있는 정근이를 바라보며 예기치 않게 흘러간 오늘 하루를 생각했다. 곧 해가 질 시간이었다. 깊은 잠에 빠져든 그를 잠시 바라봤다. 탄탄한 옆구리와 오목한 배꼽을 지금도 기억한다. 손에 들고 있던 만화책을 덮고 조금씩 정근이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배꼽에 얼굴을 파묻고 냄새를 맡았다. 더 깊이 살결의 냄새를 맡고 싶었다. 잘 미끄러진 살결을 어루만지고 단추와 지퍼들을 제거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다. 그런 생각이 들자 갑자기 모든 것이 너무 무서웠고 벌떡 일어나 집을 나와 버렸다. 정근이가 잠에서 깼는지 정신이 들었는지 알지 못했다. 그냥 언덕길을 내달려 집으로 돌아왔다.



그 날 밤에 한 번 더 정근이가 가르쳐준 대로 몸을 비벼가며 욕구를 해소했다. 그는 결코 우리 교회에 나올 수 없을 것이었다. 아니 그와 이전처럼 지낼 수 있을지도 불확실했다. 우리는 함께 어깨동무를 하고 오락을 하고 공을 던지고 음담패설을 할 수 있을까. 벌써 창 밖으로 보이는 귀신이 내게 좀 더 가까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주변이 온통 스산했고 차가웠다. 누구의 목소리도 듣고 싶지 않았고 아무 형상도 보고 싶지 않았다. 왜 오늘 정근이를 퍼펙트로 이겼을까. 난 대공기도 쓸 줄 모르는데. 쓸데없는 생각에 휩싸인 채 이불 속에서 덜덜 떨었고, 그런 상황에도 정근이의 맨몸이 다시 한 번 보고 싶었다. 새벽에는 첨탑을 청소하다가 옥상에서 떨어지는 악몽을 꾸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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