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권위주의 문화의 현상과 뿌리를 이해하고 변혁을 시도하기 위하여
03. 언어
우선 글의 제목을 다소 자극적으로 적은 점에 대해 설명하고자 한다. ‘세종대왕을 좋아하세요?’라는 설문조사가 전 국민에게 실시된 적은 없을 것이고, 그렇기에 한국인의 몇 %가 세종대왕을 좋아하는지에 대한 통계숫자는 보지 못하였다. 다만, 나의 감으로 짐작하건대, 한국인의 99% 이상이 세종대왕을 좋아할 것이다. 왜냐하면 세종대왕은 이순신 장군과 더불어 가장 존경받는 역사적 인물이며, 우리에게 ’ 한글‘이라는 선물을 준 위대한 위인이기 때문이다.
한글은 위대한 문자이며, 위대한 발명품이다. 대학에서 중국어를 전공한 사람으로서 한자를 오래 공부하였으나, 아직도 내게 한자는 어렵다. 한글 보급을 통해 지식인이 아닌 일반 서민에게까지 문자를 보급한 점을 볼 때, 한글은 한국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발명품이라고 할 수 있다. 한글은 어떤 문자보다 쉽고, 과학적이며, 나는 우리나라에 한글이라는 문자가 있음이 자랑스럽다.
그러나 한글에는 높임말(경어)과 낮춘말(반말)이 존재하며, 이는 지속적으로 불평등한 관계를 재생산하고 있고 확대하고 있다. 중국어에는 높임말, 낮춘말이 거의 없다. 你(너)와您(당신)으로 상대방에 대한 호칭에 있어 격식을 차리는 경우와, 영어의 please에 해당하는 请이라는 말을 공손하게 이야기할 때 사용하는 것이 전부이다. 您(당신)의 경우도, 처음 만나는 공식적인 자리에서나 사용할 뿐, 친분이 생기면 쓸 일이 없다.
중국어와 한국어가 함께 나열된 <논어>를 읽으면, 같은 문장이라도 공자와 제자들은 중국어로는 평등한 대화를 한다. 반면, 한국어로 번역된 문장에서 공자는 낮춘말을 사용하고, 제자는 정중한 존댓말을 사용한다. 우리는 한국의 권위주의의 기원으로 유교에 대한 비판을 많이 한다. 그러나 정작 유교의 대표적인 사상가인 공자, 맹자는 제자들과 수평의 언어로 대화를 하였다. 우리가 공자와 제자 간의 대화가 존댓말과 낮춘말로 대화하는 된 책을 읽는 것은 한국식 문화와 언어에 맞게 번역되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성경>에서 예수께서 제자들과 대화를 할 때에도, 말에 있어서는 평등한 관계로 대화를 하였다. 다만, 한국어 번역본에서는 예수를 높이고, 제자들을 낮추어서 대화한 것처럼 높임말과 낮춘말로 대화가 표현된다.
한국어에는 왜 높임말과 낯춘말이 이렇게 많이 존재하는가? 중국어의 문자들을 한글로 전환하면서, 과연 누구의 결정에 의하여 이처럼 불평등한 언어구조를 가지게 된 것일까? 나는 언어학자가 아니며, 한글 창제의 배경을 깊이 연구하지 않았다. 그리고 한국어의 불평등성에 대한 모든 책임이 세종대왕에게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세종이 살아있을 당시 조선은 유교가 주류를 이루었으며, 양반과 평민, 노비의 구분이 분명한 시대적, 문화적 배경이 있었다. 문어가 아닌 구어에서 이미 높임말과 낮춘말이 지역마다 다르게 사용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한글은 구어에서 사용되던 음을 문자로 그대로 옮겨놓은 ‘표음문자’라고 할 수도 있다.
다만, 한글을 창제하면서, 당시 신분의 차이에 따라 불평등하게 사용되던 ‘말(구어)’을 ‘글(문어)’ 에도 그대로 반영하면서 한국어가 가지고 있는 차별성과 억압성이 공식화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책임은 당시 한글 창제의 최종 책임자로서 세종대왕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당시 조선시대에 한국인이 사용하던 말(구어)에 이미 차별성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우리만의 글(문어)을 만들면서, 당시 사용하던 중국의 문어(한자)도 참고하였을 테고, 중국의 문어(한자)에는 높임말과 낮춘말이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왜 한글은 굳이 높임말과 낮춘말을 세밀하게 표현하도록 하였을까?
한글이 없던 시절 한자 원문을 우리말 식으로 풀어 읽기 위해서 한자 곁에 기호나 글자를 써넣은 것을 ‘구결’이라고 한다. 점토구결은 한자에 점 혹은 선을 넣는데, 점과 선의 위치에 따라 뜻이 달라진다고 하며, 자토구결은 한자의 획을 간략히 하여 한자 아래편에 표기하는 방식이다. 이러한 구결의 방식으로는 조사(-의, -로, -을)를 표현할 따름이다. 따라서 한자로 된 문장은 구결을 더하여도 존댓말과 낮춘말로 구분되지 않는 수평적인 성격을 가지는 언어로 남아있다.
한글을 창제한 후, 당시 유일한 문자이던 한자로 된 서적들을 한글로 번역하면서 왜 굳이 높임말과 반말의 개념을 글에도 반영한 것일까? 훈민정음을 사용한 최초의 작품 <용비어천가>에는 왜 이렇게 많은 격식체를 사용한 것일까? 훈민정음을 사용하여 불경과 유교의 서적들을 번역하면서 왜 구어에 있는 존댓말과 낮춘말을 문어에까지 그대로 적용한 것일까? 아쉬움이 많이 남는 대목이다.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1443년에 창제하였고, 1450년에 운명하였다. 훈민정음을 통한 불경과 유교경전의 번역 등은 세조에 의해 진행되었다고 한다.
나는 기회가 되면 한글창제의 역사적 배경과 언어적 불평등성이 발생한 의사결정 과정을 연구하여 보고 싶다. 내가 아니더라도 누군가가 연구하여 주었으면 좋겠다. 한국학 학자들이, 국어국문학 박사님들이 연구하여 주었으면 한다.
나는 세종대왕을 respect 하며, 동시에 hate 한다.
한글을 발명한 나라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이 내가 한국인임에 자부심을 갖게 될 만큼 나는 한글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만일 과거에 한국의 국력이 강하였더라면, 영어의 기반인 로마자가 아닌 한글이 세계 보편 문자로 확산 발전할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역사와 국력 등 다른 요소들을 배제하고, 문자라는 측면에서만 보면, 한글은 로마자나 한자보다 월등한 문자라고 생각한다.
“한글은 완벽한 문자가 갖춰야 하는 조건 이상을 갖추고 있다.” 미국인 독립운동가 호머 헐버트 박사(1986~1949)가 한 말이다. 그는 또 “한글은 완벽한 문자이며, 글자 구조상 한글에 필적할만한 단순성을 가진 문자는 세상에 어디에도 없다”라고 하였다. 나는 헐버트 박사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하며, 한국인으로서 자부심을 느낀다.
쉬운 문자를 보급하여서 당시에 양반의 전유물이었던 지식을 귀천에 상관없이 공유할 수 있도록 보급한 점에서, 세종대왕은 급진적인 혁명가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구어체에서 지방마다 제각각 다르게 사용되던 높임말과 낮춘말을 문자화하여 공식화한 측면에서, 다시 말하면 한국어의 불평등성을 명문화 한 점에서, 세종대왕은 권위주의를 재생산하고 확산하는 역사적 결정의 최고 의사결정권자로서 책임이 있다. 세종대왕은 시혜적인 관점에서 백성들을 위하여 문자를 선물하였으나, 계급화된 언어구조를 문자에 그대로 반영하여 언문일체로 높임말과 낮춘말을 사용하는 나라로 만들었다.
다시 요약하자면, 한국어에 존재하는 높임말과 낮춘말을 통해 상대방과 나의 상하관계는 지속적으로 확인된다. 언어는 한국인의 무의식과 의식을 넘어서며, 차별을 일상화하고, 상하관계를 유지시킬 뿐 아니라, 권위주의를 재생산한다. 이를 통해 볼 때 한국어의 수직성은 한국의 권위주의를 형성하는 원인이자, 현상유지의 중요 요소로 지속 작용하고 있다.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에서 임금과 닮은 임금 대역 이병헌이 진짜 임금 이병헌을 대면하기 직전에, 도승지(충신)는 가짜 이병헌에게 이렇게 말한다. “임금님께서 말씀하시면 무조건 ‘네, 전하~’라고 답하거라, 그리고 임금님께 말씀드릴 것이 있다면, 먼저 ‘아뢰옵기 황송하오나…’라고 이야기하고 말씀드리거라.” 그리고 임금 역할을 해야 하는 이병헌에게 도승지는 이렇게 말한다. ”신하들이 안건에 대해 이야기하면 이렇게 말하거라 ’경의 뜻대로 하라~‘, 누군가 찾아오면 이렇게 말하거라 ’ 들라 하라~‘“ 여기서 엿볼 수 있는 것은, 임금의 말투는 대개 명령조이며, 신하의 말투는 주로 간청, 동의, 감탄의 어감을 띤다. 임금이 대변을 하였을 때, 신하들이 “경하드리옵니다~.”라고 하는 장면은 웃음을 자아낸다.
사실, 우리의 일상 속에서 우리는 신하의 말투와 임금의 말투를 비슷하게 재현하고 있다. 회사에서 상사의 말씀에 대해서는 ‘네, 상무님, 잘 알겠습니다~’라고 답하고 있으며, 상사와 다른 나의 생각을 이야기할 때는 매우 조심스럽게 ‘말씀드리기 죄송스럽지만…’이라고 말을 시작한다. 그리고 상사가 부하직원의 의견에 동의할 때는 ‘00이 알아서 해~’라고 명령조로 이야기한다.
한국어로 자유로운 토론이 이루어지기는 매우 어렵다. 상하(上下)가 다르고, 높이 있는 사람은 명령조로, 낮은 사람은 부탁조로 이야기한다. 서로 서 있는 위치와 바라보는 눈높이가 다른데, 어떻게 평등한 대화가 이루어질 수 있으랴, 존댓말을 사용하는 사람은 간청과 감탄을 하고, 반말을 하는 사람은 명령과 결정을 하는,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 속 신하와 임금의 대화가 재현될 따름이다. 반면 이는 서양에서 일반 직원들도 CEO의 눈을 바라보며, 자신의 생각을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문화와는 확연히 구분된다.
반말을 하는 사람은 내려다보면서 명령하고, 존댓말을 하는 사람은 올려다보면서 간청한다. 그러한 계단을 만들어 주는 것이 ‘언어’이다. 당연히 원활한 토론이 이루어질 수 없고, 친밀한 관계가 형성될 수 없다
이상의 내용이 이 글의 제목인 “Why I hate Sejong, the great?”에 대한 설명이며, 다시 한번 언급하자면 나는 동시에 그를 respect 한다. 또한 이목을 끌고자 약간은 고의적으로 자극적인 제목을 사용한 점도 당당히(?) 인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