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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y I hate 세종대왕(#6) : 자유와 평등

한국 권위주의 문화의 뿌리와 현상을 이해하고 변혁을 시도하기 위하여

by 파포

인류의 역사는 자유와 평등을 위한 쟁취의 역사라고 볼 수도 있다.


자유와 평등의 쟁취라는 의미는 사회적 약자가 억압과 핸디캡을 벗어나, 동일한 신분으로 취급받는 것을 의미한다.

명작 <브레이브하트>


영화 브레이브하트에서 멜깁슨이 “freedom!”을 외치는 모습은 봉건시대를 넘어서는 외침의 한 장면이었으며, 감동적인 “I have a dream“ 스피치를 한 마틴 루터 킹은 흑인들의 자유를 위해 자신의 삶을 헌신하였고, 링컨 대통령은 남북전쟁의 끝에 노예제도를 폐지하여 노예들을 해방시켰다. 혁명가인 체 게바라는 자본주의의 그늘 아래 있는 노동계급의 자유와 평등을 위하여 일평생 투쟁하였다. 그리고 가부장적이었던 한국사회에서 여성의 권익은 점차로 향상되고 있다.


이처럼 인류의 역사를 자유와 평등이 점차 확장되는 흐름으로 해석하여 볼 수도 있다. 심지어 동물의 권익이 향상되는 방향으로도 새로운 시도와 노력이 이어지고 있다. 반려동물 식당, 카페들이 생기고 있으며, 반려동물 전용 대중교통수단(지하철, 버스) 혹은 전용칸 들도 곧 나오지 않을까 싶다. 동물의 권리까지 주장하는 사회, 우리는 이러한 시대를 살고 있다.


다만, 앞서 글에서 쓴 것처럼, 아직도 한국은 ’나이‘를 기초로 한 수직사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이에 대한 사회적 문제의식과 변혁을 위한 시도는 그리 많지 않아 보인다.


내가 주장하는 것은 웃어른들에게 예절을 지키지 말자는 것이 아니다. 불평등한 인간관계를 넘어서면, 한국사회는 더 성숙하고 발전할 수 있으며, 우리는 더 많은 친구를 만날 수 있다.


”Best Idea wins”라는 회의 원칙은 google의 유일한 회의 원칙이라고 한다. 중요한 것은 회의실에 있는 “누구의 power가 쎈지”가 아니라 “어떤 idea가 가장 좋은가”이다. “목소리가 큰 사람의 아이디어가 아니라, 가장 좋은 아이디어가 이긴다.” 이 얼마나 합리적인가? 그러나 아쉽게도 한국에서 회의의 원칙은 아직도 “High ranker idea wins”이다. 얼마나 불합리하며, 얼마나 사회적인 낭비일까? 그동안 주니어들이 가진 좋은 아이디어들이 얼마나 많이 중간에서 폐기되었을까?


수직적인 한국의 문화는 빠른 의사결정과 실행력에 기초하여 한강의 기적을 일구어내는 경제발전의 기초가 된 측면은 분명히 있다. 역사상 가장 오래된 조직 중 하나인 군대는 실행력이 높은 조직구조이며, 한국 기업의 조직문화는 군대의 문화와 많이 닮아 있다. 다만, 속도가 아닌 창의력, 다양성의 측면에서는 한계를 지닌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창의력과 다양성 측면에서 경쟁력을 확보해야 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나는 중국에서 어학연수를 하면서, 그리고 영국에서 봉사활동을 하면서, 나이와 상관없이 외국인 친구들을 사귈 수 있었다. 다만 같인 시기, 같은 장소에서 만난 한국인들은 ‘나이’에 따른 구분으로 친구 사이가 될 수 없었다. 가까운 사이가 될 수는 있었으나, 상하구분을 기초로 한 미묘한 관계는 지속된다. 참으로 아쉬운 일이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 중에 같은 연도에 태어난 사람이 몇 프로나 될까? one generation을 30년으로 생각하면, 우리는 우리가 만나는 동시대인 중 30명 중 1명, 3%의 사람들 하고만 수평적인 관계에서 친구가 될 수 있다. 30명 중 나머지 29명, 97%의 사람과는 나이에 기초한 서열을 분명히 인지하면서 관계를 시작하며, 그러한 관계는 대부분 지속된다. 심지어 3%의 확률로 만난 같은 연도에 태어난 친구들 간에도 마음속으로 ‘몇 월 생’에 기초하여 누가 형 혹은 언니 인지에 대한 생각을 무의식적으로 한다.


다소 극단적으로 이야기하면, 서열 매기기를 좋아하는 수직문화는 한국의 학교와 회사에서 지속적인 폭력을 야기하고 있다. 앞서 이야기하였던, 역사, 문화, 언어를 기초로 한 한국의 수직적인 인간관계는 많은 병패를 초래한다. 우리는 언제나 누가 위고 누가 아래 인지를 생각하면서 살아간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 community를 이루면서 누가 가장 상위자인지를 정하는데 익숙하다. 한국만이 아닌 보편적인 현상이라고 할 수도 있으나, 한국은 유독 심각하다. 같은 목적으로 만난 커뮤니티에서도 나이에 따라 그룹핑이 된다.


초중고 12년의 학창생활을 하며, 우리는 동년인 친구들 이외의 선후배와는 거의 만날 수가 없다. 학창 시절에 한 살 혹은 두 살 많은 형이나 언니들을 만났다면, 대개는 좋지 않은 상황(폭력을 당하는 상황)에서 만났을 것이다. 대학에 와서 학년 구분 없이 수업을 듣고,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선후배들과도 관계를 하게 된다. 그러나 항상 나이를 기초로 관계를 맺게 되고, 그러한 순리(?)를 거스른다면 따끔한 한마디를 듣게 될 것이다. “나이도 어린 게 감히!” 회사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입사를 하면, 함께 일하는 동료라는 느낌에 앞서 위계서열에 기반한 상하관계가 더 큰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이러한 위계서열을 뛰어넘을 생각을 우리는 감히 할 수가 없다.


‘직장 내 괴롭힘’은 한국에만 있는 문제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한국 직장인들이 정도의 차이는 있겠으나, 상사와의 관계에서 많은 어려움을 느낄 것이다. 이직사유에는 다양한 요소가 종합 반영되어 있는데, 굳이 통계를 낸다고 하면, ‘급여가 낮아서’가 이직사유에서 1순위를 차지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입사할 때부터 어느 정도 급여 수준을 알고 회사에 들어온다. 따라서 기업에서 낮은 급여 수준은 채용 지원률이 낮은 사유, 입사 포기율이 높은 사유에 보다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그렇다면 ‘급여가 낮아서’가 이직사유를 묻는 항목에 대부분 check 되는 것은, 일을 하면서의 어려움들이 누적되며, 이러한 어려움에 대한 보상이 겨우 이 정도인가를 생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국에서 어려움은 대부분 인간관계(특히 상사와의 관계)에 기인한다.


그렇다면 상사들만이 문제일까? 모든 상사들을 없애버리면 문제가 해결될까? 아니다. 상사를 욕하는 당신도 버티다 보면 금방 상사가 된다. 그리고 상사는 외롭다. 특히 요즘의 상사들은 조직 구성원들의 눈치까지 봐야 한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블라인드(Blind, 같은 기업에 다니는 사람들끼리 공유할 수 있는 익명 게시판)에서 이름을 날릴 수 있다. 문제는 사람이 아니다. 문제는 구조이다. 한국의 인간관계에 대한 구조에서 문제가 기인한다. 누군가를 높인다는 것은 누군가는 낮아진다는 뜻이다. 한국의 인간관계는 매우 불평등하다. 따라서 사람들은 높임을 받고자, 높은 자리에 올라가고자 혈안이 된다. 그리고 높은 관계에 올라갔을 때, 외로움을 느낀다. 같은 눈높이에서 마음을 터놓고 대화할 수 있는 친구가 없기 때문이다.


한국인에게 있어 수직적인 인간관계를 비유하자면 이렇다. 마치 어린 코끼리를 큰 나무에 묶어두면, 코끼리가 자라서 자신을 묶어둔 줄을 끊어버릴 수도 있고, 심지어 나무자체를 뽑아낼 수 있는 힘이 있어도, 여전히 줄에 묶여 있는 것과 같다. 한국에서 언어는 코끼리를 묶은 줄과 같다. 높임말/낮춘말로 우리는 우리가 묶여 있음을 매일 확인하며 살아간다. 유교사상과 피지배의 역사에서 권위주의가 형성되었지만, 우리는 현재 ‘언어’라는 줄에 묶여서 자유와 평등을 향해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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