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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y I hate 세종대왕(#8) : 호칭 개혁

한국 권위주의 문화의 뿌리와 현상을 이해하고 변혁을 시도하기 위하여

by 파포


02 호칭 개혁

홍길동전 중 유명한 구절


홍길동은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였다. 우리 한국인은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의 이름을 감히 부를 수 없다. 나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한국인에게 무례한 일이다. 000 과장님, 000 선배님, 000 선생님, 000 형님 등, 우리는 나이가 많은 사람을 이름만으로 부를 수는 없고, 뒤에 다른 호칭과 “님”자를 붙여서 불러야만 한다.


나는 딸이 두 명 있는데, 내가 중국에서 파견 근무하면서 둘 다 국제학교에서 학창생활을 시작하여서, 둘이서는 서로 영어로 대화하는 편이다. 그러다 보니 동생이 언니를 이름만으로 부르는 일이 매우 자연스럽다. ‘언니’, ‘동생’이라는 단어들은 우리 집에서는 듣기 어렵다. 둘의 관계가 수평적이며, 가까운 친구사이처럼 느껴지며, 첫째가 둘째한테 우기고 싸우는 경우가 있더라도 “내가 언니이니까”라는 논리로 이기려 하지는 않는다.


호칭은 우리의 온전한 정체성(identity)이 아니다. 나는 회사에서 직책과 직급이 있지만, 직책과 직급이 나의 온전한 identity는 아니다. 그것은 회사에서 나의 책임과 역할일 뿐이다. 나의 가장 온전한 identity는 나의 이름이다. 물론 이름 세 글자가 나를 완벽히 대변하지는 못하지만, 나의 이름 세 글자는 나라는 인물을 부르는 유일한 고유명사인 것이다.


Who am I? 나는 누구인가? 어떻게 하면 나를 표현할 수 있을까? 내가 살아온 인생사, 나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 나의 외모와 나의 생각, 나의 취미와 나의 습관들, 내가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들… 이 모든 것들을 다 전달한다고 하더라도, 상대방이 나에 대해 다 이해할 수 없다. 언어는 유한하다. 나는 언어로 모두 표현될 수 없다. 다만 유한함 속에서 모든 것을 포함하여 나를 Labeling 하는 것이 나의 이름이며, 상대방이 나의 이름을 부를 때,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나란 존재의 특성을 모두 지닌 한 사람을 부른 것이다.


문득 김춘수 시인의 <꽃>이라는 시가 생각난다.

-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내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후략)


쌩떽쥐베리의 소설 <어린 왕자>에서 여우가 어린 왕자에게 이야기 한 다음의 말도 같은 의미에서 이해할 수 있다.

- 그래, 넌 나에게 아직은 다른 수많은 소년들과 다를 바 없는 사람이야. 그래서 난 네가 필요하지 않아. 나 또한 너에겐 평범한 한 마리 여우일 뿐이지. 하지만 네가 나를 길들인다면 우리는 서로 필요하게 되는 거야. 너는 나에게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존재가 되는 거고, 나도 너에게 세상에 하나뿐인 유일한 존재가 되는 거야…


상대방의 정체성인 상대방의 이름을 부르는 것으로 관계는 시작한다. 다만 한국인인 우리는 나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의 이름을 쉽게 부를 수가 없다. 한국의 일부 기업에서 호칭파괴를 하며, ‘000님’, ‘000프로’ 등으로 부르거나 영어이름, 닉네임 등으로 부르는 시도를 하였지만 잘 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시도를 높게 평가한다. 그들의 시도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그들을 둘러싼 외부환경이 나이가 많은 사람의 이름을 부르는 것에 거부감이 많기 때문이다. 산발적인 시도에서 그치지 않고, 전국적으로 퍼져서, 상대방의 정체성인 이름을 부르는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 한국에서도 자연스러워지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대부분의 나라에서 사람의 Name은 ‘성’과 ‘이름’으로 분류된다. 영어와 중국어에서 낯선 사람은 대개 한국과 유사하게 ‘성+호칭‘으로 부른다. 영어의 Mr. Lee, 중국어의 李先生(이 선생)처럼 성별을 나타내는 말과 함께 ’성‘을 쓰거나, Dr. Lee, 李博士(이 박사)처럼 직업 혹은 사회적 신분과 ’성‘을 함께 써서 격식을 차리고 상대방을 호칭한다. 이는 한국과 유사하다. 다만, 영어와 중국어에서 지속적으로 ’성+호칭‘으로 부르는 일은 매우 드물다. 시간이 흘러서도 동일하게 Mr. Lee 혹은 李先生이라고 부른다면, 그것은 상호 간에 거리감이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한국어로는 상황이 다르다. 우리에게 처음 만난 이박사님은 영원히 이박사님이다. 심지어 오랜 시간이 지나면 이름이 기억나지 않기도 한다.


영어와 중국어 모두에서, 신분과 나이에 상관없이 친밀한 사이가 되면, ‘성’이 아닌 ‘이름’을 부른다. ‘이름’ 앞뒤에 무언가를 더하지 않고, 오로지 ‘이름’만으로 부르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감히 부를 수 없는 ‘이름’을 영어권과 중화권에서는 매우 쉽게 부른다. 영어에서는 처음 만난 Mr. Ross가 시간을 지나 Michael이 되고, 더 편한 사이가 되어서 Mike로 부르게 되며, 아주 친한 의형제임을 과시할 수 있게 되었을 때는 Bro로 부르게 된다. 중국어에서도 李先生이 시간이 지나 李志勇혹은 志勇이 되고, 더 편한 사이가 되어서야 李哥(형) 혹은 兄弟(형제)로 부를 수 있게 된다.


반면 한국어에서는 한번 ’이 선생님‘은 계속 ’이 선생님‘이다. 조금 더 발전하면 ’이지용 선생님‘이라고 ‘성+호칭’에 이름을 더할 수 있을 따름이다. 한국에서 ’지용~‘ 혹은 ’지용아~‘ 라고 부른다는 것은, 높은 위치에서 서서 내려다보며 이름을 부른다거나, 매우 적은 확률(나이도 같고, 사회적 위치도 같은)에서 수평적인 관계를 확인하였을 때뿐이다. 오히려 영어와 중국어에서는 친한 사이가 되어야만 부를 수 있는 Bro, 哥에 해당되는 ’형‘을 나의 주인이라는 의미를 가진 ‘님’ 자와 붙여서 ‘형님’으로 부르게 되는데, 이는 친한 사이를 드러내는 표현이 아니며, 상대방 보다 내가 나이가 많다면 나는 곧바로 ‘형님’이 될 수가 있다.

도서 <예의 있는 반말>

호칭제도 개혁에 대해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한 사람이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검색을 하다가 <예의 있는 반말>이라는 책을 발견하였다. 책에 의하면 ‘디학(디자인 학교)’이라는 곳에서는 존댓말도 반말도 아닌 ‘평어’라는 언어체계를 디자인하고 평어를 사용하여 대화한다고 한다. 그들이 사용하는 평어의 특징은 두 가지이다. (1. 호칭은 이름 두자로 통일하기 2. 예의 있는 반말을 사용하기) 그들은 “고마워, 성민”, “천만에, 여경”이런 방식으로 대화하고 있다.


우선 ‘디학’의 이러한 언어 실험에 힘찬 박수를 보내주고 싶다. 많은 곳에서 이러한 민주적 언어 실험이 진행되고 진일보하여, 한국어가 수평적인 대화로 발전하면 좋겠다. 그러나 <예의 있는 반말> 책에서 만난 ‘평어’는 나에게 매우 낯설었고, 수직적인 한국어 체계에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는 나로서도 바로 적용하여 대화하라고 하면 망설여질 것 같았다. 물론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나 역시 한국에서 오랜 시간을 수직적인 언어체계를 사용하여 왔으며, 그러한 방식이 익숙하기에 변화를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평어 사용의 어색함은 ‘익숙하지 않음’만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앞서 언급한 영어와 중국어도 처음 만난 사이에서는 바로 ‘이름’을 언급하지 않는다. 물론 ‘디올’에서 오랜 시간 함께 한 사람들 간에 평어로 대화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울 지도 모르겠으나, 열다섯 명의 필진이 쓴 글과 그 글 속에서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대화하는 것에서 나는 부자연스러움과 어색한 공기를 느꼈다. 아마도 서로 친하지 않은 상태에서, 알아가는 과정을 생략하고 바로 ‘이름’을 부르게 되면서 나오게 된 어색함이었을 것 같다. 만남이란 두 사람의 거리가 가까워져서 눈을 마주치며 대화하게 되는 것이다. 서로 다른 곳에서 살아온 두 사람이 물리적 거리가 가까워져서 대화를 할 수 있게 되면서, 두 사람의 관계는 시작된다. 물리적인 거리만이 아닌 마음의 거리도 마찬가지이다. 서로를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우선은 ‘성과 호칭’을 사용하여 서로를 알아가고, 그 이후에 가까운 사이가 되면서 ‘이름’으로 부르는 단계로 나아가는 것이 자연스럽다.


나는 ‘디학’의 시도처럼 ‘이름’으로 상대를 부르는 것에 대찬성이다. 그러나 초면에는 어려울 것 같다. 초면에는 영어의 Mr. 나 중국어의 先生과 같은 ‘성+호칭’으로 부르는 것이 적합하다고 본다. 다만 ‘이 선생님’과 같이 ‘님’자를 붙여 부르는 것에 대해서는 반대한다. ‘님’은 본래의 뜻인 ‘나의 주인’의 의미에 맞게 임금님, 하나님과 같은 영역에서만 사용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본다. 모든 직함에 ‘님’을 붙이는 순간, ‘님’자가 붙지 않은 직함이 상대를 낮추는 듯한 인상을 가지게 되었다. 선생, 부장, 교수, 변호사… 회사의 직급이든, 직업의 호칭이든 원래는 모두 중립적인 의미를 가진다. 그러나 우리는 영어로 ‘teacher Lee~’라고 부르는 것은 어색하지 않지만, ‘이 선생~’이라고 부르는 것에는 어색함과 무례함을 느낀다. 바로 ‘님’자가 빠져서 이다. 상대방을 높이는 데 사용되어 온 ‘님’이라는 글자 때문에, 원래는 중립적인 의미인 ‘님’자가 빠진 직함이 무례한 상태가 되어 버렸다. 만일 ‘님’자를 원래의 취지에 맞게만 사용하고, 다른 용도로는 다시 사용하지 않는다면, 원래의 직함이 다시 중립적인 위치로 돌아오게 되지 않을까?


‘형, 오빠, 누나, 언니, 선배…’ 상하관계를 나타내는 호칭 사용을 폐지해야 한다. 영어에도 물론 누나, 오빠라는 단어가 있다. 그러나 영어에서 누나(sister)는 가족 내에서 출생순서라는 사실관계를 확인하는 단어로만 쓰일 뿐, 상대방을 부르는 호칭으로 쓰이지 않는다. 중국어에서도 누나(姐姐)는 주로 혈연관계에서만 호칭으로 쓰인다. 많은 중국인들은 한국 드라마에서 ’오빠‘라는 호칭을 시도 때도 없이 사용하는 것에 신기함을 느낀다.


나는 둘째이자 막내로 태어나서 그런지 위계서열에 대한 반발감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바뀌었으나, 내가 학교를 다닐 때는 1월과 2월에 태어난 아이들은 전년도 3월 이후에 태어난 아이들과 같은 년도에 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래서 1월과 2월에 태어난 아이들의 출생 연도 앞에는 ‘빠른’이라는 글자를 붙여 불렀다. 가령 ‘나는 빠른 82야’라고 이야기한다면, 81년생과 같이 학교를 다녔다는 의미로, 일반 82년생보다 한 학년 선배라는 뜻을 내포한다. 나는 둘째이기도 하지만, 3월생으로서 한 달만 먼저 태어났으면 한 학년을 먼저 시작할 뻔하였으나(한 계급이 높을 뻔하였으나), 아쉽게도 턱걸이를 하지 못하였다.


이런저런 이유로 나는 나보다 나이가 많은 선배들에게 높임 호칭과 존댓말을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대학교에서 1년 먼저 입학한 여자 선배들과 친하게 지냈는데, 그들 중 3명은 나와 같은 년도 1월과 2월에 태어났다. 나보다 불과 1~2개월 먼저 태어난 것이다. 그러나 한국문화에서는 존댓말을 써야 한다. 그리고 나는 그들에게 반말을 하였다. 그런데 ‘누나’라는 호칭을 하게 되면, 반말을 사용하는 것이 다소 어색하다. 그래서 나는 대개 호칭을 부르지 않거나 이름과 유사한 별칭을 불렀으며, 호칭과 주어가 생략된 말을 많이 하였던 것 같다. 호칭이 어색하면 대화를 시작하기가 어렵다. 호칭은 한국인의 인간관계를 가로막는 커다란 장벽이다. 호칭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보이지 않는 벽으로 작용하여, 쉽사리 뛰어넘기가 어렵다. 호칭의 벽을 허문다면, 우리는 더 많은 사람들과 가까워질 수 있을 것이다.


가까운 사이가 되면 ‘이름’은 이름 자체로 불려야 한다. ‘지용~’ 하고 불러야지 ’지용님~‘ ’지용씨~‘ 혹은 ’지용아~‘로 불러서는 안 된다. 이름 뒤에 ‘님’ 혹은 ‘씨’를 사용하게 된다면, 그냥 이름으로 부르는 것이 상대적으로 무례한 상태로 전락하게 된다. 그리고 이름 뒤에 ‘아~’라는 글자를 붙여 부르는 것은 수평적으로 상대방을 부르는 것이 아니라, 하대하여 부르는 느낌을 같게 된다. 아마도 명령조에 쓰이는 ‘라~’와 발음이 유사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화가 나서 소리칠 때 쓰는 ‘야~’와 유사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름을 이름 그대로 부르지 못하도록 우리를 가로막는 글자들을 이름에서 떨어뜨린다면, 그래서 이름 그대로 부르는 문화가 자연스럽게 자리 잡힌다면, 우리에게도 이름을 이름 그대로 부르는 일이 자연스러워지는 그런 날이 오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더 많은 친구를 만나게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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