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권위주의 문화의 뿌리와 현상을 이해하고 변혁을 시도하기 위하여
나이에 기반한 한국의 권위주의 문화에 대한 글을 쓰려고 생각한 지는 꽤나 오래되었다. 20대 때부터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고, 30대에 중국에서 근무를 하며, 나의 문제의식을 중국인 친구들과 나누면서, 나는 한국의 수직적인 문화가 인류의 보편적인 현상이 아니며, 외부인(한국인이 아닌)들에게는 참으로 신기한 모습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그리고 “Why I hate 세종대왕”이라는 타이틀의 글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살아왔으며, 그동안 실행에 옮기지 못하였었다.
전문 작가도 아니며, 여러 가지로 부족한 나이지만, 이러한 글을 쓰는 목적은 문제제기만을 하며, 한국사회를 비판하기 위함이 아니다. 자극적인 제목을 사용한 것은, 호기심과 관심을 끌기 위한 목적도 있었지만, 사회의 반향을 일으키고 싶었으며, 그 의도는 한국문화를 혐오하고 비판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다. 대안이 없는 문제제기는 비난에 불과할 수 있다. 다만 정확한 대안을 가지고서야 문제제기를 할 수 있다면, 누구도 문제제기를 하지 않을 것이다. 문제가 문제로 남아있는 것은, 문제가 감추어져 있거나, 문제가 드러나더라도 쉽게 풀리지 않기 때문일 것이며, 한국의 권위주의에는 두 가지 요소 모두 존재한다.
나는 한국에서 나고, 자란 한국인이며, 한국을 사랑한다. 내가 글을 쓰는 궁극적인 목적은 문제제기를 넘어서서 한국의 문화를 변화시키는데 일조하고 싶어서이다. 문제제기를 통해 감추어진 문제가 조금은 밝게 드러나고, 우수한 학자들이 앞다투어 소중한 대안을 찾아 주기 바란다. 나이와 계급을 기초로 한 수직적인 한국사회를 변혁시키기 위하여 초보적인 수준에서나마 나도 몇 가지를 제언하고 싶다.
01. 사상 (유교사상을 넘어서서)
나이와 계급을 떠나 기본적인 “인간존중”과 “상호존중”이 당연시되는 사회문화가 형성되어야 한다. 나이 많은 사람들에게 함부로 대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나이와 계급에 상관없이 기본적인 존중이 있어야 한다라는 말이다.
나이가 많든, 많지 않든 우리는 모두 동일한 인간이다. 우리는 신분사회에 살고 있지 않다. 당신은 왕이 아니며, 당신 앞에 있는 사람은 신하가 아니다. 우리는 군인이 아니다. 당신은 군대 상사가 아니며, 당신보다 나이가 어린, 당신 앞에 있는 사람은 군대의 부하가 아니다. 한국인의 의식 속에 깊이 박힌 유교의 ‘장유유서’의 사상은 ‘보편적인 인간존중’으로 바뀌어야 한다. 한국 학교의 교실에서 윤리시간에 ‘보편적인 인간존중’에 대한 교육이 ‘상하 관계 속에서의 예절‘ 교육보다 많이 다루어져야 한다.
장유유서는 봉건사회의 유산이며, 우리는 더 이상 봉건사회에 살고 있지 않다. 한국은 유교가 깊이 영향을 미친 나라이다. 유교는 중국에서 유래하였으나, 중국보다 한국에 더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중국은 공자와 맹자 등 유교 사상가를 낳은 나라이나, 사회주의로 넘어가며 분서갱유를 하고, 사회주의 평등에 대한 가치를 극단적으로 강조하는 시대를 경험하였으며, 나이에 따른 상하관계라는 의식이 거의 없는 나라이다. 다만 중국은 자본주의적 요소가 너무 빨리 정착하며, 돈 있는 사람과 돈 없는 사람의 상하관계가 부각되는 흐름으로 가고 있어서 안타깝게 생각한다. 한국도 마찬가지이지만.
물론 유교에는 배울 점이 많다. 공자의 논어는 위대한 철학서이며, 나는 그중 인(仁)에 대해 요약한 ‘공관신민혜(恭宽信敏惠)’라는 문구를 좋아하며, 모토(motto) 중 하나로 삼고 있다.
자장(子张)이라는 제자가 공자에게 인(仁)에 대해 묻자, 공자는 다섯 가지를 행하면 인(仁)이 이루어진다고 하였다. 그것은 ‘공관신민혜’이며, 공즉불모(공손하면 수치를 당하지 않고), 관즉득중(관대하면 많은 사람을 얻고), 신즉인임언(믿음을 얻으면 남이 일을 맡기고), 민즉유공(민첩하면 공을 세울 수 있고), 혜즉족이사인(은혜를 베풀면 족히 사람을 부리게 된다)이다. 각 앞글자에서 ‘공관신민혜’가 나온다.
공자, 맹자, 장자, 묵자 사상에는 시대를 넘어서는 보편적인 위대한 철학이 많이 남아 있다. 나의 주장은 유교를 모두 버리자는 것이 아니다. 시대착오적으로 봉건적인 요소가 남아있는, 한국인의 의식 속에 잘못 자리 잡은 유교사상을 바로잡자는 이야기이다. 나는 제자백가 중 실천적 이상주의자로 평가받는 묵자를 좋아하는데, 그는 ‘겸애(兼爱)’와 ‘상리(相利)’를 주장하였다. ‘겸애’는 공자사상의 별애(别爱)와 반대되는 모든 사람을 차별 없이 사랑한다는 뜻으로, 묵자는 사회적 혼란이 나와 남을 구별하는 차별에서 비롯된다고 역설하였으며, 서로 이익이 되는 ‘상리’의 관계를 만들어 나갈 것을 주장한다.(신영복의 ‘강의’ 중)
공자는 사회질서유지를 강조하는 측면에서 ‘유별(有别)’을 강조하는 바, 묵자보다 보수적인 인물이지만, 그래도 제자들과는 평등하게 대화하였다. 우리가 알고 있는 <논어>가 바로 공자와 제자들의 대화를 묶은 대화집이다. 공자가 상하관계가 분명하며, 발언권도 명확한 한국사회의 인물이었다면 <논어>는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대화집의 형식으로 구성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한 <맹자>에는 맹자와 임금(위 나라 양혜왕)과의 대화가 나오는데, 맹자가 임금의 잘못된 생각을 지적하며 바로잡아주는 의연한 장면들이 나오며, 맹자는 ‘왕의 권력은 백성들이 부여하는 것이고, 잘못된 왕은 갈아치워야 한다’는 말을 왕 앞에서 하였다고 한다.
사후세계에 대하여, 과거에 죽은 사람이 현시대를 바라볼 수 있는지 나는 모르겠지만, 만약 공자와 맹자가 현시대의 한국인들이 본인들의 사상에 기초하여 수직적인 사회를 이루고 살아가는 모습을 바라본다면 무덤에서 혀를 차지 않을까?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라는 책을 공자가 읽는다면 어떤 말을 할까? “나는 이미 죽었는데?”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지만, ”한국의 공자사상은 내 사상이 아니야, 억울하다“라고 하지 않을까?
한국은 동방예의지국? 글쎄, 한국에서 나이가 많은 사람은 나이가 어린 사람에게 ‘전혀’ 예의가 없다. 사상은 시대상을 반영한다. 유교에는 당시의 봉건적인 시대상이 반영되어 있다. 현재에 유교를 연구하는 학자들께서 유교에 있는 봉건적인 요소들을 도려내고, 시대를 뛰어넘는 보편적인 가치들을 강조하여 볼 수 있도록 해준다면, 유교는 현시대에도 한국사회의 fundamental로서 한국문화의 사상적 기반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려면 먼저 유교에 있는 봉건적인, 시대착오적인 요소들을 유교 학자들이 스스로 인정하여야 하며, 유교를 현대화하여야 한다. 공자와 맹자가 현시대에 태어났다면, 그는 분명 현시대에 맞는 유교사상을 만들어서 전파하였을 것이다.
긴 역사의 흐름 속에서 보면, 우리는 모두 ‘동시대인’이다.
후대의 사람들이 우리를 보면 우리는 단지 21세기의 같은 시대에 살았던 인물들에 지나지 않는다. 한 살 먼저 태어났다고, 혹은 한 달(12월생과 그다음 1월생) 먼저 태어났다고, 누군가가 누군가에게 평생 한 계급 높은 대접을 받는다는 것은 참으로 우스운 일이 아닐까? 도토리 키재기일 뿐이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할 뿐이다.
누군가 본인이 나이가 많다고 생각하여 “몇 살이세요?”라고 물어본다면, 이렇게 대답하자. “So what?” 물론 면전에서는 쉽게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면 나이에 기초한 권위적인 이들의 나이를 묻는 질문에, 마음속으로나마 이렇게 답하자. “So what”, “남이사”, “내가 몇 년도에 태어난 지 왜 이리 관심이 많니? 역사 좋아해?”
불평등한 인간관계, 불평등한 집단관계, 높고 낮음이 분명한 사회에서 우리는 높게 올라가고자 일평생 투쟁을 하고 있다. 높게 올라가면 행복해질 수 있다는 신기루를 쫓고 있다. 어쩌면 높게 올라가지 못하면 짓밟힌다는 위기감에서 벗어나고자 발버둥 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두 가지의 불평등이 있다. 하나는 빈부의 불평등이고, 하나는 신분의 불평등이다. 장자크 루소는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서 불평등의 기원으로 사유재산제를 꼽는다. ‘땅에 줄을 긋고, 여기는 내 땅이다.’라고 하는 순간 불평등이 시작되었다고 루소는 말한다. 불평등의 다른 하나는 신분의 차이에 기인한 불평등이다. 왕과 귀족(양반), 중인(평민)과 노예(천민)로 나뉘는 인생의 출발선에서부터 구별되는 불평등이다.
근현대의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구조 속에서 신분의 불평등은 점차로 해소되는 방향으로, 빈부의 불평등은 점차로 확대되는 방향으로 역사가 나아가고 있다. 다만 한국사회에서는 특이하게도 두 가지 불평등이 모두 존재한다.
한국학자들, 유학자들이 한국의 잘못된 차별적 인간관계를 바로잡는 사상을 연구하여 주었으면 한다. 글로벌한 시대에, 평등한 인간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다른 나라들의 사례들을 국내에 소개해 주었으면 한다. 가정에서, 학교에서, 회사에서 ’보편적인 인간존중‘에 대한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진다면, 하루 하루 일상 속에서 내가 만나는 사람들과 미묘한 긴장감이 감도는 수직적인 관계가 아니라, 수평적인 인간관계를 맺고 살아간다면, 한국인들은 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