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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휴자 Jun 03. 2023

때로는 무계획도 괜찮지 않을까

사소하지 않은 사소함 #8

이전 직장에서 퇴사했을 때의 일이다.

퇴사를 결심하고선, 팀장님한테 뭐라고 얘기를 꺼낼까 그다음엔 임원분들한테 뭐라고 얘기할까.

그런 궁리를 하고 있었다. 궁리를 하면 할수록 퇴사하는 이유에 살이 붙고 붙었다.

이렇게 말하면 이렇게 대답해야지, 저렇게 말하면 저렇게 말해야지. 그렇게 내 의견을 관철시켜야지 하면서.


퇴사하고 싶은 이유는 간단한데 그 단순한 이유를 무턱대고 말하기에는 설득이 어렵고, 논리가 헐거워

팀장님이나 임원분들의 만류에 금방 수긍해 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긴 싫었다.

그러면서도 이상했다. 상대방의 '왜?'에 그럴듯한 답을 해주기 위해 말을 만들어내는 꼴이란.

퇴사하고 싶다는 최초의 결심은 그렇게 보기 좋은 이유가 덕지덕지 붙은 모양새를 갖췄다.

그것은 공허했다.

퇴사하고 싶은 이유는 단지 '그냥 쉬고 싶어서'였다. 좀 쉬고 싶었다.

일은 벅찼고, 계속해나가야 할지 매번 헤맸다. 실컷 자고, 마음껏 쉬고 싶었다. 간절했다.

몇 번 면담을 했지만 준비를 단단히 한 덕인지 퇴사는 생각보다 싱겁게 이뤄졌다.


퇴사 후 이틀쯤 쉬고, 나는 계획이란 걸 세우기 시작했다. 으레 생각 있는 사람이라면, 그래야 하는 것처럼.

그렇지 않으면 내 삶이 쓸모없는 것으로 곤두박질칠 것 같았다(고작 이틀밖에 안 쉬었음에도 불구하고).

가느다란 끈으로 나의 쓸모를 묶어두듯, 계획을 세웠다. 어설픈 계획이었다.

쉬고 싶어 퇴사했으면서도 나의 내밀한 감정보다, 타자의 사소한 감상이 더 신경 쓰여 그랬던 것 같다.

그렇게 마음만 조급한 채로, 하루하루는 무신경하게 지나갔다.

몇 달 뒤 나는 다른 곳으로 이직을 했다.



은유 작가님의 『글쓰기 최전선』에서

"내 인식과 관점의 틀로 잡아놓은 삶의 밑그림이란 편협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그렇게 살아가는 게 행복일까 불행일까."라는 문장을 읽으며,


내 인식과 관점의 틀로 잡아놓은 그때의 어설픈 삶의 밑그림,

계획이란 게 얼마큼 쓸모가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계획적인 삶이 쓸모없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건 물론, 아니다.

삶의 어떤 구간에서는 때로, 계획보다 무계획이 쓸모가 있지 않을까 싶은 거다.


돌이켜보면, 퇴사했을 때의 나는 어설픈 계획으로 조급함을 달래기보단

며칠만이라도 나를 돌아보며 깊은 휴식의 시간을 가졌으면 어땠을까 싶은 거다.

어디선가 말하지 않았던가. 골프 칠 때 어깨에 힘을 빼야 비거리가 늘어난다고. 더 멀리 나아간다고.

그것처럼 삶에서도 힘을 빼야 더 멀리 나아가는 때가 있을 테니까.


계획적인 삶이 확실한 자기 계발을 이루는 시간이라면,

무계획적인 삶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마음의 토양에 따라

무한한 가능성을 열렬하지만 고요하게 품어내는 시간일지도 모르니까. 아니 그럴 것이니까.


그래서 누군가 지금 계획 없이 시간을 버리는 것 같은 생각이 든다면,

자존감이 밑바닥에 축 떨어져 있는 것 같다면, 조심스럽게 다가가 얘기해 주고 싶다.

무계획도 반드시 쓸모가 있는 시간일 것이라고. 마음 편히 가지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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