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화가 피었다

#09 꽃송이마다 너도 피었다

by 이봄

새벽 어스름 따라 하얗게 서리 내리면 온갖 바스락거리는 것들 사이로 노랗게 국화가 피었다. 가을의 끝자락에 홀로 푸르른 너는 찬바람 불어야만 꽃송이 키우다가 마침내 서늘하게 서리 내리면 꽃을 피웠다. 빈 들에 홀로 서서 떠나는 가을 배웅이라도 하려는지 기다랗게 이어진 담장을 따라 너는 피었다. 동구 밖 먼길까지 향길 날리고, 달조차 없는 밤길이어도 네 향기에 코 박고 따라가면 분명 사립문 반갑게 마중할 터였다.

너를 보면 가을이 깊었구나 알게도 되고, 덩달아 나는 그대를 떠올린다. 어떤 말의 끝에 그런 말을 했는지 기억에도 없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고 떠오르는 말 한마디는 그거였다.

"너를 보면 어쩐지 나는 국화가 생각이 나."

"그래? 뭣 때문에 국화가 생각이 났을까?"

무엇 때문에 국화가 연상이 되었는지 알지 못한다. 한 가지 이유만으로 국화를 떠올리지는 않았을 터였다. 대화를 하다가 말끝에 묻어나는 향기가 그랬는지도 모르겠고, 가끔 올려주는 글 속에서 노랗게 피어난 국화를 보았는지도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국화를 떠올릴 만큼 너는 많이도 닮았다 싶었다.

골골마다 단풍이 들고 어느 순간부터 불어 가는 바람에 옷깃을 여미게 되었을 때 나는 네가 생각났다. 가을은 그래서 국화와 네가 중첩되는 계절이 되었다.

국화를 보면 너 떠오르듯 나도 네게 그런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무엇을 보면 나를 떠올리게 될까? 내가 만든 이미지는 어떤 걸까 문득 궁금했다. 말이나 몸짓이 화려하지 않으니 장미처럼 화려한 꽃은 아닐 것이고, 향기 짙은 족적이 아니었으니 향기로운 꽃도 아니겠지.

봄날 떼 지어 피는 찔레꽃이라면 좋겠다. 화려하지도 특별히 향기롭지도 않지만 들녘 가득 봄빛이 만연한 날에 나비 떼처럼 피어나 은은한 향기로 미소 짓는 찔레꽃이 좋다. 나름 한 성깔 하는 가시도 마음에 들고, 여린 순 뚝 끊어내어 껍질 벗겨내면 심심풀이 땅콩으로 먹을 수도 있으니 더욱 그렇다. 독을 품어 사납지는 않지만 뾰족한 가시 가지마다 세우고서 스스로를 지키는 자존심이 좋다. 너무 굼뜨거나 재빠르지 않은 느긋함도 좋고, 저 홀로 잘난 맛에 득의양양 독불장군이 아님도 좋고, 새초롬 돌아 앉아 외롭지 않음도 좋다.

혹여라도 그대 나를 떠올리려거든 봄날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찔레꽃을 생각하면 좋겠다. 늙은 황소 쟁기질로 고단하고, 지지배배 지지배배 제비 나는 봄을 생각했으면 좋겠다. 너는 봄을 떠올리고 나는 가을을 생각할게. 나는 국화꽃을 기다리고 너는 찔레꽃을 마중해 줘. 모진 겨울 이겨내면 화사한 봄꽃으로 나는 너를 찾을 터고, 한걸음 한걸음 겨울로 가는 길목, 너는 나를 향기롭게 배웅해 줘. 계절마다 시간마다 꽃으로 피어나서 마중하고, 배웅했으면 좋겠다. 우리 오래도록 그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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