百백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by 이봄

붓을 들어 百이라고 쓰고 더는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할 말이 없어서는 아닙니다. 오히려 말은 차고 넘쳤습니다. 소원이 말 마르지 않는 화수분 하나 가슴에 들여놓고 싶다 해서 그럴까요? 언제부터인가 수다쟁이로 변해서 늘 입술에 말 몇 개 달고 살게 됩니다. 허겁지겁 먹는 모습이 곱게 보이지 않듯 말 몇 마디씩 흘려가면서 수다스런 사내가 곱게 보이지도 않겠지만 어쩌겠어요? 당신 생각하면 말이 꼬리를 물고 수다가 만발하고야 맙니다. 열 마디의 말 보다 침묵의 행동 하나가 무게를 더한다고 하지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표현하는 말이 가벼울 필요도 없고 그럴 이유도 없습니다. 그런 거죠. 남자의 눈물은 일생에 세 번이다 하는 말 말입니다. 남자라고 어떻게 세 번의 울음으로 감정을 마감할 수 있겠어요. 강요된 감정의 억제가 말을 줄이고, 어쩌면 정작 해야 할 말도 못하는 벙어리를 만들고야 말았다 생각하게 됩니다. 나는 얘기하고 싶었습니다. 날마다 뭉게구름 피어오르듯 당신에게 하고 싶은 말들이 앞다퉈 튀어나오는데 어떻게 입을 다물어 침묵을 할까요? 그 말들이 모여 백이 됐습니다. 생각에 따라 많기도 하네 할 수도 있고, 겨우 백이야 할 수도 있지요. 쓰던 나는 그렇습니다. 겨우 백이야?, 하게 됩니다. 고백의 말을 쓰게 되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마음을 온전히 적었다고 하면 아마도 백이 아니라 천이 돼도 모자랄 마음입니다. 사람을 마음에 담는다고 하는 것은 그만큼 요동치는 가슴을 안고 산다는 거라서 그렇습니다. 같은 꽃을 봐도 어제의 꽃과 오늘의 꽃이 다르듯, 당신 생각하는 마음도 그렇습니다. 어제는 노란 들꽃으로 예뻤습니다. 오늘은 푸른 바람으로 어여쁩니다. 내일은 또 어떤 모습으로 내게 올지 짐작할 수가 없습니다. 당신 날마다 얼굴 바꿔 오시는데 바라보는 나는 오죽할까요. 하루 하루 날마다 말이 샘솟아 목을 축이게 됩니다. 말은 시원하고 향긋합니다.

말을 멈추고 이런 저런 생각을 했습니다. 어떤 말로 백이란 한 마디를 장식할까?, 하는 생각도 있었고, 날 더운데 당신은 어찌 지낼까?, 하는 일상의 궁금증을 떠올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당신과 해보지 못한 일들이 생각났습니다. 하고 싶은 일들도 수다쟁이의 수다처럼 많았습니다. 그 많은 것들 중에 유독 하나의 생각이 또렷합니다. 생각해보면 별것도 아닌데 아직은 리스트에 올려야만 합니다.

맛있는 밥에 술 한 잔 곁들여 당신과 함께 하는 시간이 좋습니다. 당신과 마주앉아 마시는 커피 한 잔은 또 얼마나 향기로운지 말로 표현 할 수가 없습니다. 뜨거운 입맞춤은 또 어떻고요. 당신 안아 느껴지는 심장박동은 마치 살아 꿈틀거리는 활화산 같다고 하면 너무 지나친 표현일까요?순간 순간이 타는 목마름입니다. 타는 목마름으로 당신 사랑한다고 해도 그 뒤에 남겨진 게 있구나 싶었습니다. 팔베개 곱게 하고서 마주 안아 얘기가 하고 싶습니다. 새벽이 밝아올 때까지 도란도란 얘기하고 싶습니다. 밤은 포근한 이불로 우리를 감싸고 별은 봄꽃으로 반짝이겠죠. 빼꼼이 열어둔 창으로는 세상 온갖 얘기들이 바람으로 날아들고, 나는 또 당신 귓가에 세상 얘기들 들려주겠죠. 지긋이 눈 감아도 좋습니다. 졸음이 밀려드는 순간이거든 졸아도 괜찮습니다. 다만 나는 당신 얼굴 바라보며 이마에 머리카락 쓸어넘기며 얘기하고 싶습니다. '당신 사랑합니다' 하는 고백의 말도 좋겠지만 쌔근 거리는 숨소리는 어찌나 좋은지 모르겠어 속삭이면 그만입니다. 희뿌옇게 스며드는 새벽에 손 담갔다가 이슬같은 바람 두엇 잡아다가 두 볼에 뭍히고도 싶습니다. 까박 졸다 일어나는 당신은 또 얼마나 상큼할까요? 가장 정갈한 샘이 솟고, 밤새 씻기운 바람은 또 얼마나 시원하게 불까요. 도란도란 이야기로 지새운 신 새벽에 마침내 당신에게 고백의 말 하나 남기고 싶습니다.

"은경아? 있잖아 난 니가 정말 좋아! 사랑해, 은경아!"

백이란 숫자가 쌓여도 결국은 처음처럼 난 같은 말만 되내게 되는 앵무새인가 봅니다. 언제부터였을까요. 당신 첫눈에 들어오던 날부터 나는 당신이 좋습니다. 어떻게 100이란 숫자로 쌓인 마디 하나 장식할까 고민하다가 결국은 "사랑해!" 말 하나 남기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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