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호라

by 이봄


눈 쌓인 들에 그림자 하나 길게 누웠다. 누워 잠든 듯 미동도 없었지만 해가 서산으로 기울 때쯤이면 밭고랑 몇 개를 등짝으로 기어서 넘었다. 짧은 해가 꼬리를 감추면 그의 그림자도 고단한 하루를 접었다. 밤새 도둑고양이 한 마리가 지나쳤고 청승맞은 부엉이가 입을 삐죽거렸을 뿐 밤은 길었고 적막했다. 귀를 물어뜯는 바람이 아니었다면 죽음과도 같은 고요가 밭고랑을 타고 넘으며 출렁거렸을 게 분명했다.

아우성치고 비명을 내지른다고 해도 들어줄 귓구녕 하나가 없었다. 지나가는 고양이야 발소리조차 죽여가며 어둠을 넘나들 뿐 그의 말에는 귓구녕을 닫았다. 모든 것이 얼었고 모든 것이 깊은 잠에 빠졌다. 동면이었다. 뒷산에 빼곡히 들어찬 잣나무며 참나무가 진작에 졸았고, 가래나무며 산벚나무가 뒤를 따랐다. 잔뜩 졸음을 먹은 나무들은 툭툭 이파리를 끊어냈다. 알록달록 산야를 물들이던 것들은 집단최면이라도 걸린 듯 동시에 하품을 하고 천 근 눈꺼풀을 껌뻑이면 애물단지에 지나지 않았다. 거침없이 잘라내야만 하는 미련처럼 나뭇잎이 떨어졌다.

뚝뚝 비지땀을 쏟았다. 여름이 막 물러날 때 이랑을 짓고 고랑을 내었다. 대파도 한 이랑, 갓도 두어 이랑 자리를 차지했다. 계집애들 진저리 치는 무도 그만큼 자리를 내어주고 배불뚝이 아저씨처럼 통통한 몸집을 자랑할 배추는 그보다 곱절의 이랑을 주었다. 또 뭐가 있었더라, 머리를 긁적여야만 할 만큼 들어찬 것들이 수다스러웠다. 소낙비 요란을 떨며 몰려가듯 왁자지껄 가을이 몰려간 뒤에 그는 홀로 남았다. 빈 들에 남아 가을을 떠나보냈고 겨울을 마중했다. 늘 오고 가는 것은 허전했고 쓸쓸했다.

투덜대는 말들은 바람에 묻혀 사라졌다. 소용도 없는 아우성은 가뜩이나 허전한 가슴에 휑한 바람으로 남았다. 긴 허리 곧게 펴고서 그림자 하나 길게 드리운 것은 그런 까닭이 있었다. 장딴지 같은 무가 뽑혀나간 자리에 정오를 매달고, 알싸하게 매운 대파가 자라던 자리엔 손가락 셋을 그려 넣었다. 치맛자락 살포시 두르고 부끄럼 많던 배추가 못내 눈물짓던 이랑엔 어스름 해를 끄적여놓았다. 태초의 말들이 문자로 남듯 정으로 쪼아 새긴 상형문자 몇 개 만들고서 그는 계절을 기다리는 망부석이 됐다.

긴 기다림의 끝에는 봄날이 기다리고 있겠지만, 그래서 너의 기다림을 응원은 한다만, 삭은 몸뚱이로 제대로 마중을 하려는지는 알 수가 없다. 계절은 모질고 겨울은 사나워서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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