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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잉지 Jun 03. 2019

아침

#001

 

 우편함, 아무도 앉지 않는 의자, 진동하는 풀잎, 늘어진 전깃줄, 낡은 간판, 닫힌 문, 도시가스 계량기, 제멋대로 넘친 화분, 나무 그림자, 골목에 버려진 양말, 입을 쩍 벌린 음식물 쓰레기통, 꽃집 고양이, 카페 입간판, 기울어진 햇살, 담벼락 너머 웃음소리, 구겨진 커튼, 밥 냄새, 낭랑한 리코더, 바람에 실려 오는 마삭줄 꽃향기, 그리고 신호등.


 걸음을 멈추게 하는 것들.          










     



 매일 같은 길을 걷습니다. 아침마다 어디를 향하는 일상은 오랜만입니다. 어쩌면 어딘가로 향한다는 사실이 가장 기쁜 것 같기도 해요. 거의 같고 조금씩 다른 골목을 걷는 동안 발을 멈추게 하는 것들을 썼습니다. 이런 순간이 차곡차곡 모여 기억이 되겠죠. 오늘은 학교 옆 담벼락에 붙어 한참 코를 킁킁거렸습니다. 지난주에는 없던 꽃이 피었거든요. 마삭줄이라고 하더라고요. 이름은 낯설고, 향기는 익숙한 나무였습니다. 나무 뒤로는 운동장에서 한 무리의 아이들이 체조를 했고요, 창문 너머로는 ‘떴다 떴다 비행기’ 하고 리코더 소리가 들려왔어요. 그 곁을 누가 호다닥 달음박질쳤습니다. 아마도 지각생이겠죠. 매일 아침 걷는 길에서 만나는 순간을 고이 엮으면 어떤 기억이 될까요. 지난가을의 코스모스를 기억합니다.











 일기 외에 무얼 쓰지 않은지 오래됐습니다. 안 쓰다 보니 못쓰게 된 것인지 못 써서 안 쓰게 된 것인지 몇 번이나 이유를 찾아보려 했는데 도무지 알 수가 없어요. 마침 누가 백일 동안 매일 글을 쓰는 소모임을 만든다고 해서 뒤는 생각지 않고 함께 하기로 했습니다. 공백을 제외하고 하루에 400자. 금방 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전혀 쉽지 않았고요, 생각보다 길어서 괜한 소리를 주절주절 쓰고 말았습니다. 그러고 나니 즐겁네요. 뭔가를 쓴다는 게 이런 감각이었던가요. 언제나 어려웠고 여전히 어렵습니다. 백일 후엔 지금보다 더 나은 것을 쓸 수 있길 바라요. 다시 그저 그런 것들을 쓰게 되어 송구한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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