놓아야 닿을 수 있는 풍경
며칠 전 외삼촌이 "요즘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곡인데, 우연히 들었다"며 노래를 들려주셨다. 노래 가사 속에는 <화엄경>의 한 구절이 담겨 있었다.
"나무는 꽃을 버려야 열매를 맺고, 강물은 강을 버려야 바다에 이른다."
아무 생각 없이 듣던 중, 이 문장이 마음 한구석을 오래 건드렸다. 꽃잎을 떨구는 나무의 모습은 쓸쓸했고, 강둑을 떠나는 강물의 뒷모습에선 두려움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새로운 열매와 더 넓은 세상을 향한 자연의 선택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순한 이치가 삶과 겹쳐 보일 때쯤, 문득 질문하게 됐다. 지금 나는 무엇을 붙잡고, 또 무엇을 놓아야 할까.
돌이켜 보면 변화를 앞둔 순간은 늘 망설임이 많았다. 새로운 도전 앞에서, 누군가와 더 가까워지기 위해 마음을 열어야 할 때도 "아직 준비가 덜 됐어."라며 핑계를 대곤 했다. 작년 가을에도 그랬다. 유튜브 채널을 시작하고 싶었다. 콘텐츠 아이디어가 있었고, 시나리오도 써놓았으며, 촬영 장비까지 마련했다. 하지만 밤늦게까지 완벽을 좇으며 편집 버튼을 눌러도 늘 만족보다 아쉬움이 먼저 자랐다.
몇 달이 지나자, 촬영 장비엔 먼지가 쌓였고 시나리오 파일은 컴퓨터 속 어딘가에 묻혔다. 결국 준비라는 말은 두려움을 덮기 위한 핑계였고, 완벽주의는 실패에 대한 불안함을 숨기는 방패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냥 해보지 뭐' 하며 별 준비 없이 지원한 브런치 작가는 덜컥 선정되었다. 몇 달을 고민한 영상 콘텐츠는 시작조차 못했지만, 단 몇 시간 고민한 글쓰기가 작은 결실을 맺은 것이다. 그 아이러니가 큰 깨달음을 줬다. 완벽한 타이밍이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고, 필요한 건 그저 떨리는 마음으로 첫발을 내딛는 용기였다는 걸.
"아직 준비가 안 됐어."라는 말은 나를 감싸는 따뜻한 담요 같았다. 하지만 그 담요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묶는 족쇄였다. 불완전한 상태로 첫걸음을 떼는 게 두려웠지만, 어설프게나마 시작했을 때 비로소 알게 됐다. 불안은 잠깐 몸을 스치는 찬 바람일 뿐이고, 그 뒤엔 상상하지 못했던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는 것을.
얼마 전 몇 년간 소식이 끊겼던 오랜 친구들과 어색한 대화를 나눴던 날이 떠오른다.
“정말 미안. 이 말을 꼭 먼저 하고 싶었는데.”
“야, 괜찮다. 지금이 중요하잖아.”
말은 엉키고 마음은 조급했지만, 그 어색한 순간이 우리를 다시 가까워지게 했다. 변화는 낯선 얼굴로 다가오지만, 막상 손을 잡아 보면 뜻밖의 길이 열리곤 한다.
이제는 조금 다르게 생각해 보려 한다. 완벽한 준비 같은 건 존재하지 않으며, 때로는 불완전함 속에서 시작한 일들이 더 큰 성장을 가져다준다는 것을. 유튜브 채널은 아직 시작하지 못했지만, 브런치에 글을 쓰며 조금씩 용기를 얻는다. 이 글쓰기가 언젠가 영상 콘텐츠로 이어질지 모르겠다. 중요한 건 완벽함이 아니라, 시작하는 용기라는 걸 이제야 깨닫고 있다.
손을 놓는다는 건, 포기가 아니라 더 넓은 가능성 앞에 나를 가볍게 놓아두는 일인지도 모른다. 한동안 ‘완벽해야 해’라며 스스로를 가뒀지만, 길을 여는 건 준비가 아니라 서툰 용기였다. 어설픈 발걸음 하나가 삶의 방향을 완전히 바꿀 때가 있다. 오늘이 아니면 돌아오지 않을 기회가 있다면, 미숙해도 시작하기로 한다. 어설픔 속에서 싹트는 힘을 조금씩 믿는 중이다.
내일은, 오래된 친구와 술 한 잔 해야겠다.
#낙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