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낙원 노트] 삶이라 할 수 있겠군요.

잠겨 죽어도 좋으니 너는 물처럼 내게 밀려오라.

by 낙원
FKJ – Ylang Ylang : 파도처럼 잔잔히 번지는 앰비언스



인연은 파도처럼 밀려와서는 물거품처럼 스러진다. 때로는 시내버스의 문턱을 넘는 낯선 승객처럼 잠깐의 동행을 나누고, 각자의 종착지로 흩어진다. 삶은 그렇게 예고 없는 조우와 작별의 물결 속에서 끊임없이 요동친다. 새로운 인연이 불쑥 찾아오면, 잊힌 듯했던 얼굴이 기억의 수면 위로 떠오르고, 묻혀 있던 시간마저 생기를 띤다. 미래에 어떤 영혼과 마주칠지 가늠할 수 없으나, 이 순간의 흐름을 온전히 받아들일 뿐이다.


고등학교 입학 첫날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동떨어진 동네 출신이라 교실에 들어섰을 때 아는 얼굴이 단 하나도 없었다. 복도를 지나는 웃음소리와 대화 사이에서 나만 혼자 떨어져 있는 듯한 고립감이 컸다. 그날 수업이 끝나고 뒷자리에 앉은 아이가 불쑥 내게 말을 걸었다. "야, 같이 동아리 할래?" 그 짧은 한마디가 없었다면, 그 후의 나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지금껏 내 곁을 지키는 가장 소중한 친구는 그렇게 우연히 내 삶에 스며들었다.


만남은 나를 빚는 연금술이다. 그들의 말투가 내 혀끝에 스미고, 눈빛이 내 시야를 물들이며, 웃음소리가 내 가슴에 메아리친다. 나도 모르게 그들의 색채에 젖어 변모한다. 동시에, 나의 존재는 그들에게 미묘한 파문을 일으킨다. 서로의 영혼에 스며들어 흔적을 새기는 것이 인연의 본질이다. 어떤 이는 바람에 흔들리는 잎처럼 가볍게 스치고, 어떤 이는 깊은 뿌리를 내린 고목처럼 묵직한 울림을 남긴다. 그 교차 속에서 나는 나의 내면을 탐색하고, 그들은 자신의 거울을 들여다본다.


"사람을 줄여서 '삶'이라 할 수 있겠군요."


이 문장은 내 안에 깊이 뿌리내렸다. 사람과의 얽힘은 삶의 정수를 이루는 실타래다. 인연은 단순한 스침이 아니라, 서로를 채우고 비우며 존재에 의미를 더하는 여정이다. 그 안에서 우리는 환희를 맛보고, 고통에 몸부림치며, 결국 한 겹 더 성장한다. 삶이란 인연의 연속선 위에서 펼쳐지는 서사이며, 그 흐름 속에서 각자는 자신만의 낙원을 조각해 간다.


며칠 전에는 그 고등학교 친구와 늦은 밤까지 전화를 나눴다. 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서로의 삶에 함께해 온 친구의 목소리에서 시간의 켜가 느껴졌다. 우리는 서로의 삶에 흩뿌려진 작은 기억들을 주워 모았다. 첫 면접에서 긴장했던 이야기, 실연의 아픔을 함께 달랬던 밤, 여행지에서 길을 잃었던 에피소드까지. 마치 바다에서 밀려온 조각들처럼, 우리의 이야기는 때로는 거칠고 때로는 반짝였다. 그 순간 깨달았다. 인연이란 단순한 동행이 아니라, 서로의 시간에 남기는 보이지 않는 지문과도 같다는 것을.

돌이켜보면, 과거의 나는 실수와 후회의 연속이었다. 잘못된 판단으로 길을 잃고, 소중한 순간을 놓치며, 때로는 날카로운 말로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었다. 그때마다 후회와 자책이 따라붙었다. 하지만 어느 날 문득, 내게 남은 모든 실수와 아픔이 결국 오늘의 나를 만들었다는 걸 깨달았다. 완벽하지 않은 길을 걸어오면서도, 나는 조금씩 스스로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려 애썼고, 덕분에 다시 일어설 힘을 얻을 수 있었다.

그들이 있어 매번 끝났다고 생각한 자리에서도 다시 걸어갈 수 있었다. 그들의 존재는 내 삶에 깊은 뿌리를 내린 나무처럼 흔들리지 않는 버팀목이다.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으니, 마음 깊이 감사함이 밀려온다.

삶이란, 결국 우리를 스쳐 간 인연들과 함께 엮어가는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바쁜 일상에 묻혀 잊고 지낸 이름과 얼굴, 이미 멀어진 사람도 있고 여전히 곁에 머무는 사람도 있다. 그 관계와 기억 덕분에 우리는 조금씩 더 깊어지고, 한층 더 따뜻한 존재가 되어간다.

#낙원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