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심코 TV를 틀었더니 ‘무쇠소녀단 2’가 나온다. 소재가 복싱이다 보니 관심이 가는 것은 당연지사. 잠시 TV를 보다가 나는 자리를 뜬다. 남편 혼자 시청한다. 보통 때라면 채널을 돌려도 벌써 돌렸을 남편인데 한참 TV에 집중한다. 잠시 후 내게 다가와 내 글러브를 가리키며 묻는다.
“저 글러브는 좋은 거야?”
“어차피 연습용인데 뭐.”
“얼마짜리야?”
“안 비싸. 처음 복싱 등록할 때 산 거잖아.”
남편은 다시 TV 속 무쇠소녀단의 스파링을 집중해서 보더니 내게 말한다.
“글러브 좋은 걸로 하나 사.”
갑자기? 굳이 필요하지는 않은데, 남편 마음이 변하기 전에 얼른 사야 하나? 괜찮은 글러브를 끼면 펀치가 강해지려나, 폼은 좀 더 나려나?
나는 소위 말하는 ‘장비빨’에 큰 관심이 없다. 장비가 좋아야 멋져 보이고, 자신에게도 멋져 보이면서 생기는 자신감이 운동에도 영향을 미친다고 하는데, 그럼에도 별 욕심이 없다. 애초에 ‘장비’에 대한 관심이 그리 크지 않다.
학생 때만 해도 그렇다. 친구들이 형형색색 볼펜이나 형광펜을 가지고 공부할 때도 나는 그냥 검정 볼펜이나 샤프펜슬 하나면 만족했다. 다른 문구류에 대한 기억도 없는 것으로 봐서는……음, 공부를 안 했던가, 그랬나 보다… 확실히 안 했다.
여하튼, 그러니 ‘복싱’을 시작할 때도 ‘장비’에 대한 욕망은 없었다. 글러브와 핸드랩은 복싱을 등록할 때 같이 구매했고, 여분의 핸드랩은 동생이 사용하던 것을 받았다. 운동복도 있던 옷에 또 동생에게 받은 옷 더하기 급하게 쿠팡에서 부른 반바지, 신발은 달릴 때 신던 약간은 헐렁한, 헌 운동화, 줄넘기는 복싱 체육관 소장용… 이렇게 적다 보니 이 조합이 좀 웃기기는 하다.
하지만 원래 나의 목표 ‘체력 증진’이 우선이었으니 아무 옷이나 입어도 괜찮았고 헌 운동화라도 운동하는데 불편하지 않았다. 편하기만 하면 되지.
그러다 개인용 줄넘기를 샀고, 쇼핑몰 장바구니에 운동복이 자꾸 들어가기 시작했다.
어느 날, 관장님은 신발장에 놓인 회원들의 복싱화를 뿌듯하게 바라보다가 내게 권유했다.
“복싱화 신으면 멋질 것 같지 않습니까?”
“에이, 못하는 제가 신으면 더 웃길 것 같은데요?”
“더 잘할 수 있습니다. 줄넘기도 더 가볍게 뛰고.”
“무슨 복싱화 매직이라도 있나요?”
“복싱화 신고 자세 잡은 모습이 멋있어 보이면, 잘하고 싶어 집니다.”
일리는 있어 보였지만, 내게 복싱화는 시기상조라며 웃고 말았다. 그냥 운동에 맞는 운동화를 신는 것인데 나는 그것이 영 어색하게만 느껴졌다.
복싱을 시작한 지 거의 반년이 넘었을 무렵, 강남에 일을 보러 나갔다가 스포츠 전문몰의 쇼룸에 잠시 들어갔다. 그때, 복싱화 한 켤레가 눈에 들어왔다. 마음에 드는 복싱화의 사이즈를 부탁해서 신었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고 ‘왜 이렇게 어색하지?’라며 그 어색한 표정으로 어색하게 쇼룸을 나왔다.
결국, 시간이 더 흐른 뒤에 무난한 복싱화를 구입했다.
처음 복싱화를 신던 날, 관장님은 엄지 척을 내보였다.
“오, 멋집니다!”
흔한 인사치레일지라도 ‘진짠가?’ 하며 거울 속 내 모습을 바라봤다. 내 나이에 장비빨로 기댈 수 있는 거창한 멋은 없었지만, 쇼룸에서 신어볼 때처럼 어색하지 않았다. 아마 그때 나는 '나의 복싱' 또는 '복싱하는 내 모습'에 자신이 없었나 보다.
관장님은 미트를 잡고 “앞으로 더 잘해야 합니다.”라고 연습에 들어갈 자세를 잡았다.
“네? 그런 부담은 쫌.”이라고 대꾸하며 관장님의 미트를 받을 준비를 했다.
복싱화를 신었다고 날개를 단 듯 내 몸이 가볍게 움직이는 것은 아니었지만, 뭔가 복싱하는 폼이 좀 나는 것 같기도 했다. 여전히 ‘장비빨’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나만의 운동 장비들을 단출하게라도 갖추면서 느낀 것이 있다. 복싱, 오래 하겠구나! 장비를 갖춘다는 것은 ‘폼’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의지’를 다지는 것이라는 것을.
복싱화를 길들이기 시작할 때, 끈을 매고 푸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이 영 불편했다.
“관장님, 복싱화 끈 금방 매는 방법 없나요?”
“없습니다!”
역시나 단호한 관장님의 대답이었다. 이어지는 교훈적인 말씀.
“신발 끈을 매면서 복싱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 봅니다. 오늘은 어떻게 연습할지, 어떻게 움직일지.”
일종의 '기획'이다. 아무리 관장님이나 코치님의 지도를 받더라도 나의 운동 시간에 내가 할 수 있는 '오늘의 복싱 주제'를 잡고 '복싱 기승전결'을 만들어 연습하면 더 좋지 않을까 싶다.
그게 필요한데, 솔직히 매일 잊는다.
오늘도 여전히 잊고, 끈을 매면서 딴생각에 빠진다. 그리고 관장님에게 묻는다.
“관장님, 글러브 추천해 주세요!”
남편이 적극 권유할 때, 장비빨 좀 세워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