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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파랑 Mar 08. 2018

열 살짜리 거짓말

<100일 글쓰기> 49/100


엄마 아빠는 둘이 처음 만났을 때부터 맞벌이였다. 취직을 하지 않은 엄마 친구랑 만난 선 자리에서 우리 아빠는 대놓고 '저는 맞벌이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고 싶습니다.' 따위의 선언을 했다고 한다. (확실히 보통 아저씨는 아니다.) 영 껄쩍지근한 분위기에 우리 엄마를 부른 친구분(그 분도 특이하다) 덕분인지, 어쨌든 엄마랑 아빠는 동종 업계에서 일하는 맞벌이 부부가 됐다

내가 태어날 때도, sis가 태어날 때도 엄마에게 주어진 짧은 출산 휴가 외에 엄마와 아빠 모두 육아 휴직 같은 건 써본 일이 없다. 덕분에 우리 자매는 반 넘게 외할머니 손에 자랐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즈음이 되어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가는 바람에 그때부터 하교 후에는 내내 혼자였다. 피아노 학원도 다니고 바이올린 학원도 다니고, 잠시 바둑 학원에도 다녀봤고, 꽤 오래 화실에도 다녔다. 방과 후 프로그램도 제대로 없을 때였으니 학원에 맡기지 않으면 둘 데도 없었고, 마냥 놀게 두자니 걱정이 됐을 것이다. 엄마 아빠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겠지.


열 살, 바이올린 학원을 며칠 안 가고 놀이터에서 친구들이랑 놀았던 적이 있다. 딱 학원 끝날 시간에 맞춰 집 현관문에 들어서는데 안쪽에서 선생님과 통화 중인 엄마의 목소리를 듣고 집을 튀어나갔다. 한 시간 가량 근처 놀이터에 앉아서 혼자 훌쩍훌쩍 울었다. 가출이 될 뻔한 첫 경험이다. 학원에 가기 싫으면 가기 싫다고 말을 했으면 될 일인데, 몰래 무단 결석을 하고 다녀왔다고 거짓말을 했다. 갑자기 사라진 나를 걱정해서 찾으러 다닌 아빠가 혼내지 않고 롤케이크를 사주셔서 다행이었다.

거짓말을 했고, 엄마 아빠를 여러모로 놀라게 했던 기억이다. 얼마나 생생한지 당시에 아빠가 사주신 롤케이크가 커팅된 조각 롤케이크였다는 것과, 안쪽을 색깔이 다른 다섯개의 덩어리로 채운 것이었다는 것까지 기억난다.


비슷한 시기에 또 기억하는 것은 외식에 대한 거짓말이다. 분식이 너무너무 먹고 싶은데 시내에 있는 좋아하는 분식집에 배달을 시키려면 8천원 이상 되는 메뉴를 주문해야 했다. 외가에서 이모들한테 용돈으로 받았던 만원짜리 한 장을 들고 한참 고민했다. 엄마 아빠가 퇴근하려면 아직 먼 시간이었고, 나는 쫄면 사리가 들어간 떡볶이와 비빔만두가 너무 먹고 싶었다. 두근두근한 마음으로 주문을 하고 나서도 엄청나게 초조했다. 배달온 음식은 맛은 있었지만 양이 너무 많아 반도 못 먹고 남겨 그대로 돌려보내고 말았다.

어설픈 거짓말로는 엄마에게 동네에 있던 곰탕집에 가서 혼자 밥을 사먹었다고 했다. 왜 하필 골라도 곰탕이라고 얘기를 했는지는 지금도 모를 일이다. 초딩이 혼자 곰탕집에 가서 밥을 먹는다니! 정작 난 그 집에서 진짜로 밥을 먹은 기억은 없다.

엄마에겐 기특하게 느껴지는 딸의 성장이었는지 외가 식구들에게 '혼자 곰탕을 사먹고 왔대.' 하는 소문이 났다. 가장 자주 용돈을 쥐어주고 예뻐해주시는 큰이모가 유난히 구체적으로 후기를 물어오셨다. 나의 일거수일투족이 다 재밌고 1부터 100까지 다 궁금하다고 명절 때마다 모이는 이모들 중의 큰이모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난 우물쭈물하다가 어디부터 꼬였는지, 5천원 내고 곰탕을 먹었다고 답해버렸다. 그리고 식구들은 아리송해한다. 그 시절의 물가로도 곰탕은 5천원일수가 없었으니까...! 거기부터 의혹은 피어올랐지만, 너무나 당황해서 시선을 피하고 방으로 도망가는 나에게 이모는 더이상 아무 것도 묻지 못하셨다.

지금 생각해도 정말 이불킥 백 번할 어설픈 거짓말이다. 그때도 그게 부끄러운 줄은 알았던 게 더 웃기기도 하고. 왜 아직도 그 옛날의 기억이 선명할까. 대개 감각에 기억을 얹어놔야 겨우 기억하는 사람인데, 그 어릴 때 어설프게 거짓말한 기억은 왜 여전할까. 어쩌면 일상적으로 뱉어내야하는 크고 작은 거짓말들에 비하면 퍽 순진했던 시절이라 그리 진하게 남아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주 쓰는 내내 부끄러웠다가 씁쓸해졌다가 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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