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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준성 Apr 03. 2018

엉덩이의 방해 공작|히라우 웰컴센터

홋카이도 한 달 살기

“아까 그 천사가 아니었으면 우리 꼼짝없이 길에서 잠을 잘 뻔했다 그치?”

“응, 그런데 나 사실 아까 진짜 놀랐었어……. 분명 우리밖에 없었던 것 같은데 어둠 속에서 갑자기 사람이 나타나니깐. 진짜 귀신은 아니겠지? 크크크.”


진짜 귀신이나 천사가 아니었을까 하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우리는 가까운 편의점으로 갔다. 긴장이 풀려서인지 며칠이라도 굶은 양 배고픔이 밀려왔다. 대형마트에서 장을 보기 전까지 간단하게 먹을거리라도 사야 했다. 일본의 편의점 음식은 확실히 기대 이상이었다. 아이들이 먹을 삼각김밥과 빵 그리고 맥주와 주전부리류를 조금 골랐다.  



배고픔 때문이었는지 긴장이 풀려서인지는 확실히 구분은 안 가지만, 얼마 마시지 않은 것 같은데 알코올의 기운이 슬슬 올라왔다. 자기 전 온종일 밖을 누비고 다녔던 아이들을 씻겨야겠지만, 오늘 하루는 나쁜 부모가 되기로 했다. 낯선 침대에 수정이를 눕히고 잠옷으로 갈아입혔다. 그리고 공갈 젖꼭지와 애착 인형을 꺼내려고 아내의 가방을 찾았다.


“짝꿍(아내를 부르는 애칭), 자기 가방 어디 있어?” 

“응? 문 옆에 없어? 어디 있겠지.”


짐을 흩어 놓은 상태가 아니었다. 집에 오자마자 짐들을 입구에 대충 던져놓았는데 거기에 있어야 할 아내의 가방이 보이지 않는다. 순간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하루에 나쁜 일이 두 번이나 생길 리 없다고 애써 긍정의 기운을 모아 가방을 찾았지만 없다. 있어야 하는데 없다. 없으면 안 되는 데 없다. 이미 숙소를 찾는 과정에서 얇아질 대로 얇아진 맨탈은 슬슬 금이 가기 시작했다. 


기저귀 가방일 뿐이다. 기저귀도 물티슈도 다시 사면 그만이다. 4년 된 아이패드가 약간 아쉽긴 해도 업그레이드를 위한 핑계가 생겼으니 그것도 나쁘지는 않다. 그런데 없으면 안 되는 공갈 젖꼭지와 애착 인형이 없다는 것은 당장 오늘 밤부터 우리가 정상적으로 잠을 잘 수 없다는 뜻이다. 비상사태다. 


아이들은 나름의 애착 인형을 선택한다. 세 돌이 될 때까지 다른 아이들보다 특히나 예민했던 첫아이 윤정이는 애착 인형 선택도 남달랐다. 내가 손수 만들어 준 수제 백호 인형(아이의 띠가 호랑이인데 그 해가 백호 해라 흰색 호랑이 인형을 직접 손바느질로 만들어 줬다)을 시작으로 할머니가 선물해 준 고양이 인형과 언니들에게 물려받은 인형들까지. 수많은 인형 중에서 강아지 인형을 받아들였다. 당시 일본에 살았던 외숙모가 첫돌 선물로 일본 아이들에게 인기가 높다는 강아지 인형을 주었었다. 수건 재질의 하얀 강아지 인형을 윤정이는 목숨과 같이 사랑했다. 목욕하는 순간을 제외하고는 단 한순간도 몸에서 떨어진 적이 없다. 덕분에 세 돌까지의 모든 윤정이 사진에 강아지 인형이 함께했다.  


언제나 강아지 인형을 들고 다녔다.


조금이라도 안 보이면 죽어라 울어버리는 아이라 자주 빨고 햇볕에 말릴 기회가 거의 없었다. 방금 손으로 반찬을 집어 먹고 그 손으로 다시 인형을 만지는데 인형이 깨끗할 틈이 없었다. 게다가 잠들 때는 그 인형을 얼굴에 부비부비 해야 겨우 잠이 들곤 했는데 손때 그득한 인형을 빨지 않을 수도 없어 윤정이가 낮잠이 들고 나면 다른 흰옷들과 세탁기 삶음 기능으로 목욕을 시켜주고 내 머리도 귀찮아 그냥 놔두는데 인형은 아이 깨기 전에 말리느라 10분이 넘도록 드라이를 해줬었다. 


첫애가 두 돌 때쯤 되었나? 강아지 인형 등에 슬슬 피부병이 생기기 시작했다. 수건 재질인 피부에서 돌기가 하나둘씩 빠지더니 성근 그물망 안으로 솜이 훤히 보이는 것이다. 이대로는 못 버틸 듯하여 다시 일본 외숙모한테 같은 강아지 인형을 부탁했다. 며칠 뒤 돌아온 답변. 단종이 되어서 파는 곳이 없단다. 


포기하고 지낸 지 며칠이 지났을까? 다행히 일본 옥션에서 비슷한 것을 구했다고 연락이 왔다. 어찌나 고맙던지. 그렇게 받은 새로운 인형은 색만 하늘색이었고 모든 것이 첫 강아지 인형과 같았다. 


기대를 잔뜩 하고 윤정이한테 주었는데 아이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내가 보기에는 훨씬 깨끗하고 부드럽고 예쁜데 자기의 애착 인형과는 달라 보이나 보다. 아이는 뭔가 불길한 기분이 들었는지 전보다 더 병든 강아지 인형에 집착했다. 하는 수 없어 손바닥만 한 손수건 한 장을 등에 올리고 내가 손수 한 땀 한 땀 손바느질을 해서 가려 주었다. 언뜻 봐서는 코끼리나 낙타 등에 사람이 타기 위해 깔아놓은 양탄자처럼 보였다. 그래도 좋다고 윤정이는 연신 싱글벙글했다. 


그 강아지 인형은 결국 수정이가 태어난 다음까지도 우리와 함께했다. 


그 기억이 강렬해서 둘째는 애착 인형을 안 만들었으면 했다. 뭐 그건 내 생각이고 소리 소문 없이 아이는 집에 굴러다니던 국민 애벌레 인형(길이가 길고 흔들면 소리가 나며 마디마디마다 알록달록 색을 가졌다)을 애착 인형으로 받아들였다. 내심 바라지는 않았지만, 워낙 유명한 인형이라 우리나라에서 아이가 있는 집에 꼭 하나씩은 있을 정도로 흔한 인형이었다. 인터넷에서 주문하면 하루 만에 받을 수 있는 인형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다.  


그런데 하필 애벌레 인형이, 그것도 일본에 도착하자마자 가방과 함께 사라졌다. 인형이 없으면 잠이 들지도 않을뿐더러 겨우 재웠다 하더라도 수시로 인형을 찾으며 우는 둘째 수정이. 한국이라면 하루 이틀만 참으면 구할 수 있는 인형인데 잃어버린 곳이 이제는 반대로 일본이다. 차라리 강아지 인형이었으면 좋았겠다는 쓸데없는 상상을 하며 아내와 머리를 맞대고 앉았다. 


“언제까지 있었는지 기억나?”

“모르겠어. 아까 웰컴센터에서 너무 당황해서 그런지 아무것도 생각이 안 나.”


“아빠, 아빠 사진기를 다시 보면 알 수 있지 않을까?”


오호! 당황한 부모는 윤정이 아이디어에 손바닥을 ‘탁’ 쳤다. 카메라를 꺼내 돌려 보자마자 답이 나왔다. 다행히 악몽의 히라우 웰컴센터로 올라가는 뒷모습에서 찾을 수 있었다. 그럼 그 이후라는 이야기이니 웰컴센터 아니면 체크인 센터에 있을 것 같았다. 같이 나서려는 아이들과 아내는 집에 있으라 하고 혼자 슬슬 걸어 웰컴센터로 향했다. 


우리나라의 여름밤만 생각하고 반소매에 반바지만 입고 나갔다가 다시 뛰어들어가 점퍼 하나를 걸쳤다. 한국에서는 날씨가 심술을 부려 폭염이 2주째 이어지고 있는데 여기는 한낮 빼고는 점퍼가 있어야 하는 날씨다. 호텔을 제외한 홋카이도 대부분 집에는 에어컨이 없다고 한다. 


동네가 익숙하지 않아 구글 지도를 따라 웰컴센터에 도착했다. 예상대로 문은 굳게 닫혀있었다. 스마트폰 플래시를 켜서 창문에 대고 안을 비춰보았다. 


앗싸! 다행이었다. 아내 가방은 초저녁의 충격이 쉽게 잊히지 않는지 의자에 멍하니 앉아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일단 있는 것은 확인했지만 내일 아침까지 기다리자니 손 탈 것도 걱정이고 오늘 밤 아이와 씨름할 것도 걱정이었다. 우선 주변부터 둘러보았다. 옆으로 비스듬히 열린 창문이 보였다. 아쉽게도 어느 정도 이상 열리지 않게 가이드가 있지만 대충 열린 폭이 내 머리는 들어갈 듯했다. 


육중한 몸을 얕은 담 위로 올려놓고 머리부터 들이밀었다. 

‘어, 머리가 쉽게 들어가네? 이거 들어갈 수 있겠는걸?’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양팔과 어깨를 넣는 순간 내가 알고 있던 상식이 틀렸다는 것을 알았다. 누군가 사람은 머리가 들어가면 나머지 몸도 빠져나갈 수 있다고 하던데 거기에는 단서가 빠져 있는 것 같다. 


‘단, 40대 이상의 남자는 배와 엉덩이가 걸릴 수 있음.’ 


이걸 단서로 달아놨어야 했다. 상체가 쉽게 들어갔기에 그 아래는 걱정도 안 했다. 배는 힘을 빼고 숨을 참아 어찌어찌 밀어 넣었는데 엉덩이는 내 근육의 조정을 받지 않는 지역이었다. 


몸의 반은 안에 있고 나머지는 밖에 있는 상황에서 한참을 고민했다. 밖에서 누군가 나를 봤다면 아마 기절했을 테다. 아무리 해봐도 엉덩이를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혼자 가방을 꺼내 아내에게 ‘짠’ 하고 싶었던 욕심은 엉덩이의 방해로 접어야 했다. 


“왜? 없어? 장난하지 말고 빨리 말해 봐.”

시무룩하게 집에 들어간 나를 보고 아내가 물었다. 


“아니 웰컴센터에 있더라고.”

“어? 다행이네. 그런데 표정이 왜 그래?”

“그게…… 사실 말이야…….”


아내는 가방 구출 작전에 실패한 이야기를 듣더니 뒤집어졌다. 아이들 옷을 챙겨 입히고 내 엉덩이를 툭툭 치며,

“우리 엉덩이 고생했네! 우쭈쭈쭈. 그것 봐 우리 가족은 항상 같이 다녀야 한다니깐 크크크.”


뭐, 뒷이야기는 상상하는 그대로다. 아빠와 아이들은 날씬한 엄마가 웰컴센터를 터는(?) 멋진 모습을 보며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짝꿍아, 하루가 참 길다. 그치?”




다음날 다시 가본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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