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중과 소통의 평화적 압력이 필요하다
최근 벌어진 일련의 교권 침해 사건들을 바라보며 많은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교육공동체의 회복"을 말합니다. 그러나, 교육공동체를 회복해야 한다고 말하기 전에 우리가 교육공동체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각자가 생각하는 교육공동체의 모습은 같은 듯 다른 모습입니다. 교육의 당사자인 학생, 학부모, 교사도 교육공동체를 그리는 모습이 제각각입니다. 사실 교육공동체에 관한 것뿐만 아니라 학교교육에 대한 목표와 목적에 대하여 일치된 입장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이런 현실에서 학교 교육을 바로 세우고, 교육공동체를 회복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공허한 주장일 뿐입니다.
따라서 교육공동체 회복을 위해선 학교 교육의 역할에 대한 본질적 합의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물론 쉽진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노력 없이 현재 산적한 학교교육의 현안을 해결하는 것은 요원하다고 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변덕스럽고 불안정한 삶의 조건들을 특색으로 합니다. 영국의 저명한 사회학자인 지그문트 바우만은 "장기적 안정의 부재로, ‘즉각적 만족’이 하나의 합리적 전략처럼 여겨진다"라고 말합니다. 즉, 우리 사회의 미래가 불안정하고, 자본주의 경쟁체제는 더욱 심화되는 상황에서 사람들은 불확실한 미래를 기대하기보다 '즉각적인 만족'을 선택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학교는 어떠할까요. 학교교육에 내재된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논리로 인해 학교 구성원들은 경쟁과 배제를 미덕으로 삼고, 승자와 패자로 서로를 나누도록 강제당합니다. 지식은 단지 상급학교 진학을 위해 존재하고, 배움은 학생들에게 고된 노동으로 변질되었습니다. 학생과 학생의 관계는 진학을 위한 서열이 결정되는 경쟁자로, 넘어서야 하는 장애물로 존재합니다. 학교는 학생들을 성적에 따라 선별하여 상급 학교로 진학시키는 행정 기관으로 존재합니다. 학교 구성원들 간 관계의 단절은 소속감을 약화시키고 공동체적 관계를 훼손합니다.
학교에서 자신의 미래와 공동체의 미래를 상상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학벌과 서열로 구분 짓기라는 즉각적 만족에만 집중하게 됩니다. 이런 현실에서 학교가 교육공동체로서 역할을 하길 기대할 수 있을까요?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교육공동체의 회복'을 주장하는 것은 왜일까요? 그리고 그것은 가능하긴 한 걸까요?
근대적 의미에서 공동체란 공동의 관심사와 목표, 이해를 가지고 구성된 사회집단을 뜻합니다. 그리고 적어도 사람들이 희망하는 공동체는 공존공생이라는 규범을 준수하며 안전한 공간에서 이웃들과 더 나은 삶을 공유하고자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희망으로 만들어진 국가와 사회라는 공동체에게 구성원들은 자신들의 안전을 지켜줄 것이라 기대합니다. 그러나, 현재 공동체 구성원들에 대한 안전은 국가와 사회가 책임지기보다는 거의 대부분 개인의 책임으로 떠넘겨지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각 개인은 불확실한 장래의 희망을 기대하기보다는 즉각적 만족을 선택하게 됩니다. 공동체 구성원들 간 합의된 장래보다는 당장 현실에서 추구할 수 있는 만족에 그치고 이것은 종국적으로 공동체의 안전을 해치게 됩니다. 그래서 지그문트 바우만은 "인간적 가치의 필수불가결한 한쌍(자유와 안전) 가운데 안전에서 너무 멀리 떨어진 방향으로 급격하게 변화"하는 현실에 대하여 공동체성 회복이라는 응답이 요청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현실은 학교교육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박숙영선생님은 [공동체가 새로워지는 회복적 생활교육을 만나다]에서 "학교가 교육공동체로서 역할을 회복하기 원한다면, 일차적으로 학교의 공간을 안전하도록 만들어야 하고, 안전한 공간을 만들기 위해서는 훼손된 관계성을 회복해야만 한다"라고 주장합니다. 안전한 공간과 정서적 평안이 없는 곳에서는 어떠한 배움과 교육도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교사, 학생, 학부모에게 학교가 안전한 공간이 된다는 것은 가능할까요?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학교 구성원 간 공동체적 관계성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경쟁과 효율성, 통제와 결과 중심에서 협력과 배려, 존중과 과정중심으로 학교 교육이 변화해야 합니다.
그중에서도 학교 구성원 간 관계성 회복을 위해서는 상호 존중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비폭력대화 지도자인 수라하트는 [비폭력대화]에서 "존중이란 말의 핵심 의미는 '살핀다'이다. 상대방을 존중한다는 것은 그들이 하는 경험을 살펴보는 것, 특히 그들이 갖고 있는 느낌과 욕구를 살피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즉 존중은 '허용한다'의 의미보다는 '살핀다'에 더 무게중심이 있다 할 것입니다. 즉 서로의 삶에 대하여 살피고 차이를 이해하고 성찰하는 과정을 통해 공동체성은 회복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에서 이러한 변화를 요구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특히 교육 공동체 구성원으로서의 관계성이 없다고 생각하는 학부모는 더욱 그렇습니다. 최근의 교권침해 사건에서 드러났듯이 문제 학부모들의 존재를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일부의 문제 학부모가 문제를 일으키지 못하도록 교육공동체의 관계를 유지시키는 "평화적 압력'입니다.
평화적 압력은 공동체 구성원 간 합의된 "평화와 상호 존중의 약속"에서 형성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평화적 압력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공동체 구성원들 상호 간에 지속적이고 끊임없는 소통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특히 학부모 전체가 일상적으로 만나기 쉽지 않으므로 공적 기구인 학부모회가 소통의 가교 역할을 해야 한다. 물론 학부모회가 학교와 학부모간 또는 학부모와 학부모들 간 발생하는 다양한 갈등 상황에 매번 개입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학부모회는 정기적인 소통의 장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일상적인 소통을 통해 학교 구성원들 간 불필요한 오해와 갈등을 방지하고, "평화와 상호 존중의 약속"을 규율로 정해 지속적으로 안내하고 참여를 촉진함으로써 분위기를 이끌어야 합니다. 이러한 노력을 통해 "평화적 압력"이라는 문화가 형성되어야 합니다.
거대한 불길 앞에 작은 물 한 방울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경쟁과 효율성을 추구하는 교육 현실에서 상호 존중과 소통을 이야기하는 것이 무모해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 일을 하지 않는다면 다른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작은 희망이라도 가지고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것부터 하는 것이 필요한 때라고 말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