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역국을 끓였다. 소고기 없이 약간의 참기름으로 미역을 볶은 후 마늘과 다시다, 간장, 소금을 넣어 끝냈다. 벌써 오후 4시 30분이다.이것이 오늘의 첫끼이자 점심인 셈이다.어쩜 마지막 끼니일 수도 있고.
미역국은 헤어진 아내가 제일 좋아한 음식이었다. 사실 난 그다지 챙겨 먹는 음식은 아니다. 혼자 살기 시작하면서만들기 간단하고 먹고 나면 든든함도 있고 해서 나에겐 딱 맞는 먹거리로 변하였다.라면 또한 1년에 손가락으로 헤아릴 정도로 꺼려했지만 지금은 박스째 사다 놓고 먹고 있다.
그나마 다행인 건혼자 먹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는점이다. 회사에서도 일에 치이다 보면 자주 그러곤 했으니 으레 껏 그러려니 하고 먹고만다.
나와 친한 권(씨)형은 혼자 먹게 되는 점심은 아예 거른다고 했다. 왠지 초라하고 궁색 맞아 보여 먹지 않는다 한다. 주위를 둘러보면 40대 이후의 사람들 중에는 권형처럼 혼자 점심 먹는 것에 거부감을 갖은 사람이 꽤 있는 듯같다.
수 십 년 전만 해도 많은 형제들과 아웅다웅 싸우며 밥 먹는 가정이 꽤 많았었다. 오죽하면 '밥상머리'교육이라는 말까지 있었으니까.가족과 함께 대화하며 식사하는 문화에 익숙한 이들이 혼밥에 소외감을 느끼는 것은 당연할지 모른다.왠지 다수 안에 끼지 못한 초라함이라고나 할까.
하지만 맞벌이 부모와 과외, 학원에쫓기거나 쫓겼던 지금의 10대와 20대에게 혼밥은 그리 낯선 광경이 아니다.오히려 더 편하게 생각하는 이도 있다. 메뉴 선정에서부터 자유롭고 굳이 상대방을 의식하며 조심히 먹을 필요도 없기 때문일 것이다. 점심시간을 온전히 나만의 시간으로 만들 수 있다는 이점도 있다.
식구(食口)를 한자대로만 풀이하면 같이 밥 먹는 사람들을 말한다. 인간에게 있어 첫 번째 욕망인 식욕을 함께 즐기는 이들이다. 생존과 직결되는 먹는 행위를 나누며 때론 베풀기도 한다는 것은 분명 믿음에 기반을 둔관계이기 때문 일 것이다. 반대로 늘 혼자 먹는다는 것은 내편이 없거나 공감의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일 수 있다. 복잡한 현대 사회에서 단정 지어 말하기엔 무리가 있을지 몰라도 혼밥보다 함께 식사는 것이 감정을 갈무리하기에 손쉬운 것만은 확실하다.
난오랫동안 보신각 근처에서 직장생활을 한 덕분에 그 인근의 맛집들을 줄줄이 꿰고 있다. 가끔 지인들의 모임 장소도 추천해 주고 개발 등으로 이전된 원조집들을 알려주곤 한다. 곰탕, 설렁탕, 추어탕, 해장국, 된장찌개 등 전통적인 음식부터 스파게티, 치킨, 카페, 프렌차이점 등 일대의 맛집들은 종목에 관계없이 훤하다.
친구나 직장동료들과의 급한 모임에 아주 요긴하게 쓰인다. 때로 음식은 어색함과 불편함을 무마시키는 주요 소재로도 사용되기 때문에 분위기 전환에 이것만큼 좋은 것이 없다.
일본의 에세이스트 '헨미 요'는 그의 저서 <먹는 인간>에서 '먹는다'라는 행위에 대해 원초적인 물음을 던지고 있다. 전쟁과 굶주림 속에서도 지치지 않고 살고자하는 의지의 행위는 '먹는 것'이었다. 가치 있는 삶을 살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도 '먹는 것'이었다.
먹는 행위는 그 사회의 문화를 나타내는 지표가 될 수도 있다. 식사의 형태는 구성원들의 근본적 의식과 감정의 흐름을 알려주기도 한다. 개인의 식습관은 용인된 관습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단순히 배를 채우기 위한 '동물의 먹다'와 의식을 영위하기 위한 '인간의 먹다'는 당연 급이 다른 행위일 것이다.
인간의 식사는 배만 채우는 단순한 일을 넘어 감정의 교류도 나누어 먹는 일이다. 그런 탓에 혼밥의 시대는 이득보다 손해가 많은 결과를 가져오는 듯하다. 홀로 된 식탁은 각자의 감정을 누구와도 나눌 수가 없게 만들어 버렸다. 돌아선 등과 등 사이엔 차디찬 침묵뿐이고 고민과 불안 또한 홀로 소화해야 한다.
식사는 우울한 감정을 키울 수도 가라앉게 할 수도 있다. 누구와 먹는가에 따라 감정의 색깔이 달라지게 된다. 이미 같이 먹는다는 것 그 자체가 '너와 함께 할 거야'를 넌지시 의미하는 경우도있다. 그래서 직장인들의 점심 식사는 항상 고민이 된다. 혼밥이 느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혼밥도 습관이 된다. 그로 인해 감정 또한 격리될 수 있다. 굳이 나를 표현하지 않아도 상관없다. 가끔은 내가 아닌 타인의 감정을 들어주는 것도 괜찮은 일이다. 듣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나는 무리 안에 섞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