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별에 조금 더 머물러줄래?
누구의 잘못도 아닌데 친구와 연락이 뜸해졌다. 서로의 안부보다 최애의 소식을 더 자주 전하던 우리였다. 티저가 뜨면 타임테이블에 일정을 맞췄고, 콘서트 티켓팅날에는 시계를 맞춰 카운트다운을 한 다음 공연장에서 만났다. 하지만 우리는 올가을에 할 새로운 이야기가 없다. 2025년 4분기에 예정되어 있던 레드벨벳의 컴백 일정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보통 일상이 멈추지는 않는다. 익숙함은 매일 착실하게 색과 모양을 바꿔 간다. 겨울, 봄, 여름 그리고 당연히 기다려온 계절. 언제나 시간은 내 마음을 앞서 가지만, 나는 3년 전 멋대로 불시착한 이 행성에 조금 더 오래 머무를 생각이다. 예정에 없던 일이지만 너무 걱정하지 말자. 레드벨벳과 러비. 내 별의 시간은 천천히 흘러가니까..✨
완전체 활동이 없어도 레드벨벳은 바쁘게 지냈다. 아이린과 슬기의 콘서트 BALANCE의 아시아 투어가 끝났고, 웬디는 단독 콘서트 'WE:ALIVE'의 미주 투어를 시작했다. 얼마 전 조이는 <Love Splash!>로 미니 앨범 솔로 활동을 마쳤고, 예리가 출연한 드라마 '청담국제고등학교2'도 종영했다. 멤버들 모두가 에스엠과 재계약한 것은 아니라 그룹 활동 일정이 바뀔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컴백 소식이 사라질 줄은 몰랐다.
하지만, 분명히 즐거운 한 해였다. 만약 기억이 나지 않는다면 옛날 노래를 들으면서 옛날 사진을 들여다볼까. 나는 옛날 사람들이 모여하는 옛날 얘기가 제일 재밌다. 선곡은 나부터. 레드벨벳이 작년 데뷔 10주년에 발매한 미니 앨범의 타이틀곡 <Cosmic>을 들어보자. <Peek-A-Boo>를 함께 작업한 켄지(KENZIE)와 문샤인(Moonshine)이 프로듀싱한 이 노래는, 넓은 우주에서 레드벨벳이라는 별을 여행하고 간 사람들에게 레드벨벳이 보내는 러브레터다.
겨울은 슴콘으로 시작했다. 올해 데뷔 12년 차의 레드벨벳은 이제 단체 공연의 막바지에 등장한다. 그 말은 곧 레드벨벳의 무대를 다 보려면 다섯 시간이 넘는 콘서트를 끝까지 봐야 한다는 뜻이었다. 체력도 일상도 돌아오는데 5일만큼의 여운이 필요했다. 그다음 달엔 레드벨벳 10주년 콘서트 영화가 개봉했다. 공연장이 아닌 곳에서 레드벨벳을 만난 것은 처음이었다. 무대인사에 응원봉 대신 립밤으로 나온 미니 김만봉을 가져갔다. 내 작은 낭만은 주머니에 꼭 담긴다.
봄에는 레드벨벳의 노래로 플레이리스트를 만들었다. 멜론에서 검색하면 나오는 발매곡이 총 199곡. 레드벨벳의 노래 중 좋아하는 노래 다섯 개가 똑같으면 천생연분이라는 이야기를 봤다. 레드부터 벨벳까지 다채로운 컨셉을 선보인 레드벨벳의 음악이 그만큼 다양하기 때문이다. 어제는 수록곡, 오늘은 타이틀곡을 골라 들으니 월화부터 수목까지 질릴 틈이 없었다. 역시 인연은 쉽게 찾아지지 않겠지. 그러니 일단 노래방에서 내가 고른 노래에 200번도 넘게 나오는 단어를 나눠 불러 줄 친구에게 연락을 할 거다.
유난히 뜨거웠던 올해 여름에는 아이린&슬기의 콘서트에 다녀왔다. 원래 예매한 자리는 연석이 아니었는데 다른 러비가 자리를 바꿔줘서 친구랑 같이 공연을 볼 수 있었다. 간식으로 레드벨벳 쿠키를 나눠 먹었다. 친구와 같이 앉아 같은 빛을 내는 응원봉을 흔드는 일이 이렇게 즐거운 일이었다니! 우리는 응원법과 앵콜을 함께 외치고 짐살라빔을 다시 맞았다. 나는 다른 여름이 와도 이날을 쉽게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아니, 앞으로의 여름도 이렇게 기억할 수 있으면 좋겠다.
레드벨벳의 음악은 현실과 꿈의 경계를 넘나드는 상상 속 세계를 표현한다. 나는 레드벨벳의 노래를 따라 낮에는 내가 살아가는 세상을 만들고 밤이 되면 온 세상 모든 경계를 휘저을 여행을 꿈꿨다. 이 여행은 크고 작음, 느리고 빠름이 중요하지 않았다. 남들보다 늦게 시작한 덕질은 그동안 레드벨벳의 활동을 따라가는 것이 마치 무지개를 쫓아가는 모험 같았는데, 요즘처럼 새로운 소식이 없으니 숨은 그림 찾기 같다.
하지만, 오랜 덕후인 나는 꽃가루를 날리지 않고도, 샴페인을 터뜨리지 않고도 할 수 있는 놀이를 잘한다. 레벨업 프로젝트에서 다녀간 슬로베니아 와이너리의 카바이 내추럴 와인, 7월 7일 7시 7분에 7월 7일 듣기, 외출할 때 빠질 수 없는 부광약품 쑥찜팩, 아이린이 바르셀로나 서점에서 산 스도쿠, 슬기가 다녀온 서촌의 식당, 조이가 남해에서 마시고 취한 맥주, 웬디가 매일 챙겨 먹는 영양제와 예리가 만든 짜자자잔- 건배사. 매일 내 일상에 숨어 있는 레드벨벳을 찾았다. 어김없이 반짝거렸다. 거봐 내가 또 이겼어.
우린 참 별나고 이상한 사이다. 같은 해 같은 달에 커리어를 시작한 우리는 지난 12년을 쉼 없이 바쁘게 보냈다. 여유가 생기고 나서야 나의 세상과 다른 색과 모양으로 훌쩍 자라 버린 세상을 알게 되었다. 이 사랑은 내게 아직 낯설지만, 나는 앞으로 지나갈 모든 계절에 레드벨벳과 함께 아직 보지 못한 것들을 찾고 싶다. 잠깐 쉬어가는 이곳이 우리의 목적지가 아닌 것은 분명하다. 틀림없이 잠시 쉬고 나면 더 멀리 갈 수 있을 거다.
그래서 나는 올가을에도 이렇게 레드벨벳의 행복을 찾는 모험 일기에 방명록을 남긴다. 물론 앞으로도 당연히 종종 다녀갈 예정이다. 이제야 만난 언제나 빛나고 있던 나의 별. 벌써 이 별에서 몇 번의 여행을 함께 했으니 나를 이 모험의 동료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 아이린, 슬기, 웬디, 조이, 예리. 그리고 나와 러비들이 숨겨진 별을 찾아내는, 그 과정을 또다시 사랑이라 이름 붙일 모험이 계속되길 바라며. 모두 행복을 찾길 바라며. 사실 나는 이미 찾아낸 것 같지만.
우리 다시 모험을 떠나자.
아껴둔 노래를 나에게도 들려줄래?
p.s. 어떤 레드벨벳을 좋아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