뛰는 건물주 위에, 나는 나는

마을의 왕이 될 테다

by 박애주





이제야 말하는 거지만, 박애주의 덕후로 사는 건 사실 쪼끔 피곤하다. 이 세상에는 아직 내가 하고 싶은 것이 많고, 가지고 싶은 것도 너무너무 많기 때문이다. 오래 덕질을 하다 보니 내가 원하는 모든 걸 다 이룰 수 없다는 것은 충분히 알겠다. 이러니까 다들 이루기 어려운 소원 앞에 '꿈'이라는 말을 붙이는 걸까. 꿈의 무대, 꿈의 직장, 꿈의 차, 꿈의 집, 그리고 꿈★은 이루어진다. 세상은 내게 어렸을 땐 꿈은 크게 가지라더니, 어른이 되니 갑자기 그 꿈을 가지고 타협하자 한다.



하지만, 맥시멀리스트 덕후는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 내가 가진 꿈의 크기만큼 내 방의 크기를 늘릴 수 없다면, 말 그대로 덕질의 사이즈를 줄이는 걸 고려해 볼 차례. 나의 이번 사랑은 조카를 비롯해 다른 머글 친구들이 집에 놀러 와도 옷장에 다 감출 수 있다. 내 취향의 옷이라곤 하나도 없는 무채색 옷장 속 숨겨진 이 알록달록한 네모네모 세상은. 애들과 머글은 가라. 이것이 진정한 어른 덕후의 취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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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고(LEGO)는 1932년 덴마크의 목수 올레 키르크 크리스티안센이 만든 블록 장난감이다. 덴마크어로 '재밌게 놀다'라는 'leg godt'에서 이름을 따왔다. 처음 나왔을 때는 나무로 만들어졌지만 많은 변화를 거쳐 지금과 같은 플라스틱 블록이 되었다. 주력 모델은 레고 시티, 레고 테크닉, 레고 프렌즈 등이 있고, 해리 포터, 디즈니, 동물의 숲, F1과 방탄소년단까지 다양한 세계관과 협업해 관련 굿즈와 테마파크, 영화가 만들어질 정도로 인기다. 내가 어렸을 때는 레고 사자성이 최고였는데, 이건 요즘 '올드 레고'라고 한단다^.ㅠ



어른이 되고 레고에 다시 입덕하게 된 것은 레고 모듈러(modular) 시리즈 때문이다. 레고 모듈러는 가로x세로 25.5cm의 밑판에 2,000~3,000개의 브릭으로 커다란 건물을 만들 수 있는 레고 전문가용 모델이다. 모듈러는 하나의 건물을 세우면 다른 모듈러와 연결할 수 있어, 시리즈를 모아 나만의 디오라마-하나의 서사를 가진 기다란 배경-로 도시를 건설할 수 있다. 아니 근데 진짜, 나는 애초에 이렇게 커다란 마을의 주인이 될 생각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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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처음으로 조립한 레고 모듈러는 2015년에 출시된 탐정사무소(10246)다. 이발소, 당구장, 탐정사무소가 입주한, 당시 공시가 22만 9천 원의 이 3층짜리 건물에는 쿠키와 캔디를 밀거래*할 수 있는 다양한 비밀 통로가 잔뜩 숨겨져 있다. 가심비적으로나 심미적으로도 개발자로 취업한 후 전공 도서를 치워 허전한 책장을 채우기에 딱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샀다. 레고를 조립하는 시간은 언제나 그 이상의 값어치를 한다.

* 쉿-! 여기서 레고 TMI 하나: 레고 세계관에서는 어른 피규어가 단것을 많이 먹으면 살이 찌기 때문에 쿠키와 캔디는 어린이 피규어만 맘껏 먹을 수 있다ㅠㅠ








그런데 그해 4월, 최애가 새 드라마에 형사로 나왔다. 모름지기 탐정과 범인이 있으면, 이 사건을 매듭지을 정의로운 경찰이 필요한 법. 나는 그래서 그 건물 옆에 경찰서를 만들었고, 최애의 상대 배역의 레벨을 맞추기 위해 매력적인 악당 '할리 퀸'을 캐스팅했다. 내가 사랑하는 이야기들을 보태고 보태다 보니 마을이 생겼다. 나의 레고 세계관은 책장에서 옷장까지, 요즘 아이돌 에스파 세계관보다 더 빨리 확장 공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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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을에서는 내가 아는 모든 세계관이 만났다. 최애가 위아래로 새까만 옷을 입고 귀신을 퇴마하는 대박 드라마에 나왔을 때는 빈집에서 최애와 유령이 결투했고, 미국 드라마 '내가 그녀를 만났을 때(How I Met Your Mother)'의 '바니'는 알라딘이 굴뚝으로 금고에 바로 침투할 수 있는 은행에서 일했다. 광장 분수대에 어느 다섯 가족이 주말을 맞아 놀러 나왔고, 이 모든 걸 마을의 제일 높은 곳에서 해리의 단짝 친구 헤드위그가 지켜보고 있었다. 설명서대로 만들어진 완벽한 세상에 내 사랑을 몰래 섞어서 노는 건 너무나 짜릿한 일이다.








그렇지만 나의 마을은 레고 모듈러 시리즈 10주년을 기념으로 2017년에 출시한 레고 어셈블리 스퀘어(10255)를 끝으로 더는 증축되지 않았다. 탐정사무소, 레스토랑, 영화관, 펫샵, 은행, 카페와 베이커리, 꽃가게랑 백화점까지 있는 마을에 내가 아는 모든 세상을 충분히 담을 수 있었고, 무엇보다 그다음에 나온 패스트푸드 가게, 부티크 호텔이 우리 마을 세계관에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떤 취미를 영원히 계속할 수 있을까. 그동안 다른 덕질을 하느라 소홀했지만, 나는 여전히 이 모든 것을 사랑하며 그저 궁금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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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겨울에도 우리 집 베란다, 아보카도가 자라는 남서향의 정원 옆에 크리스마스트리를 꺼내며 옷장 속 레고 마을에도 겨울을 데려왔다. 광장에 분수대 대신 크리스마스트리를, 길거리에 겨울왕국 엘사가 재채기할 때마다 생긴 스노우기를, 집집마다 크리스마스 리스와 오너먼트까지 달았다. 단단하게 내 세상을 만들어 놓으니 수많은 이야기가 나온다. 내 마음으로 만든 내 마을. 나의 사랑이 온 세상에 다시 가득 찬다.



그렇게 잔뜩 채우고 나면 자연스레 닫히는 것이 많다. 예를 들면 엄마의 김치냉장고, 아빠의 원고, 그리고 나의 일기장 정도. 연재의 마지막 페이지를 닫기 전 누구에게도 자세히 보여준 적 없는 이야기를 데려왔다. 나의 꿈, 나의 사랑, 나의 취향을 모으다 보니 나의 세상이 아름답게 되었다는 어느 마을 작은 사람들의 뻔한 이야기다. 그렇지만, 이 작은 마을은 언제라도 새로운 사랑을 하며 새로운 이야기를 채울 준비가 되었다. 이게 다 우리 마을 부동산 사장님 덕분이다.



그동안 저의 글 조각을 함께 만들어주셔서, 저의 세상에 다녀가 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시 커피나 핫초코 좋아하세요? 저의 옷장 속 작은 마을에 괜찮은 카페가 하나 있는데 놀러 오실래요? 제 이야기는 많이 했으니, 이번엔 당신을 아름답게 하는 취미를 알려주세요. 그러고 나서 같이 눈사람 만들까요. 노래는 제가 고를게요-♬




Snowman - 장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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