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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 스테파노 Sep 08. 2024

'시지프스'를 어떻게 읽어야 할까?

무한 반복의 도전은 형벌일까, 항거일까

언젠가 백현동 사건 검찰 출두한 야당 대표의 '시지프스의 심정으로'라는 표현에 대해 말이 많았다. 각자의 입장에서 해석과 비평이 쏟아 내었다. 그런데 가끔은 진짜 그들이 시지프스의 신화를 꼼꼼히 읽었을까 궁금하기만 하다.



1.

시지프스가 처음 등장하는 것은 무한 형벌의 이야기가 아니다. 도둑의 신으로 알려진 헤르메스의 아들이자 도적의 왕, 그리고 오디세우스의 외할아버지인 아우톨리코스와의 대립이 첫 일화다.


아우톨리코스는 부친 헤르메스에게서 물려받은 능력으로 주변의 소들을 훔쳐서 자기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시지프스의 소들도 역시 도둑맞았다. 시지프스는 충분한 심증을 가지고 있었으나, 아우톨리코스는 훔친 소의 색을 바꾼다거나, 뿔을 자르면서 모습을 변형한다거나, 심지어 소의 성별까지도 바꾸어서 은폐했다.


시지프스는 고심 끝에 발굽 아래에 자기 이름을 새겨두기로 했다. 당연히 아우톨리코스의 소들 중 발굽에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소들을 찾아내었다. 이를 거증하며 도둑질을 증명하였지만,  아우톨리코스는 시지프스의 부하들이 몰래 자기 소에게 이름을 새긴 것이라는 억지를 부렸다. 그러나 진실을 가릴 수는 없었다. 당연 아우톨리코스는 물론 그의 아버지 헤르메스도 자신의 사기와 도둑질이 발각된 셈이니 자존심이 상했고, 시지프스를 곱게 보지 않았다.


더욱이 오디세우스의 진짜 생부가 시지프스라는 일설에서 볼 수 있듯이 시지프스는 신의 권위와 위세의 불공정을 밝혀낸 인간이었던 것이다.


이 지점에서 야당 대표의 시지프스 인용 은 매우 다성학적 비유로 볼 수 있다.



2.

시지프스를 유명하게 만든 일화는 익히 아는 이야기다. 그러나 그 일화의 전체 이야기를 제대로 이야기하는 사람은 참 드물다.


*그림: 티치아노 벨리치오 <the myth of Sisyphus>


제우스는 망나니였다. 강의 신 아소포프의 딸 아이기나를 납치하는데, 이를 시지프스가 아소포프에게 알려 준다. 대가는 도시를 위한 샘물이었다. 이것까지 야당 대표가 인지했다면 어제의 선언은 매우 다성적으로 조응한다.


그러나 제우스가 어떤 신이었던가. 파렴치에 후안무치의 프로토타입처럼 시지프스를 황천으로 끌고 가라고 죽음의 신 타나토스를 보낸다. 그런데 역서도 제우스는 한 방 먹는다. 타나토스가 올 것을 예상하고 시지프스는 매복 기습해서 제압해 지하 감옥에 가둔다.


타나토스가 갇힌 후 세상에 죽음이 없어졌다. 죽음이 사라지자 가장 큰 피해를 보는 것은 죽음의 신 하데스와 전쟁의 신 아레스였다. 이 두신은 열이 올라 제우스에게 항의하였다. 거기에 더해 운명의 세 여신들도 이 여파로 실타래가 갑자기 엉켜버려서 크게 항의했다.


그러나, 7 신이나 엿 먹인 시지프스를 당장 어떻게 할 구실이 없자, 신들은 어이없게도 시간이 꽤 흐른 뒤 '기만행위'로 형벌을 준다. 저승까지 끌고 왔지만 시지프스는 아내가 장례를 치러 주지 않는다고 하소연했다. 미리 아내에게 장례를 치르지 말라고 한 사실은 숨겼다. 하데스가 장례를 치르던지 아내를 벌하고 오라고 지상으로 보냈는데, 시지프스는 지상에서 천수를 누렸다. 이것이 '기만의 죄'가 되었다.


이렇게 시지프스는 다시 세상을 떠난 뒤 신들을 기만한 죄로 산 정상으로 바위를 밀어 올리는 벌을 받게 된 것이다. 바위는 정상에 오면 다시 아래로 굴러 떨어지기 때문에 처음부터 다시 올려야 하는 영원한 노동이자 영겁의 형벌이  것이다.



3.

여기에 두 가지 해석이 있다. 신을 기만한 죄로 시지프스 이후의 인간들은 '무한반복의 일상'이라는 원죄를 얻은 것이라는 해석이 있다. 이는 무척이나 전근대적 기독교 주의 해석으로 보인다. 아담과 하와의 원죄가 신을 속인 죄로 '인생이라는 과대망상'을 버티는  보속을 하는 기독교 해석과 맞물린다.


그러나, 근대의 해석은 다르다. 일상과 인생이라는 것이 무의미한 인간의 삶이 아닌 인간에게 주어진 운명에 대한 최소한의 저항 혹은 인간의 의지라고 해석하는 시각이다. 내 삶의 주체는 신의 결심이 아니라 나의 생존 의지라는 것이다.


"La lutte elle-même vers les sommets suffit à remplir un cœur d'homme; il faut imaginer Sisyphe heureux.

산꼭대기를 향한 투쟁만으로도 인간의 마음을 채우기에 충분하다; 우리는 시지프가 행복하다고 상상하여야 한다."

-알베르트 까뮈 <시지프의 신화> 중-


인간은 어차피 흙으로 돌아간다. 커다란 섭리 앞에 무기력  자체다. 그러나 인간은 끊임없이 무엇을 이루려고 욕망하고 노력한다. 결과가 뻔해 보여도 도전하는  자체에 삶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어차피 굴러 떨어질 바위라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현명한 일이라고 평가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형벌 이전의 모든 일화를 이해하지 못했거나, 읽어 보지도 않은 사람들의   훈수라고 생각된다.


당신은 정말 시지프스를 이해하고 제대로 읽었는가?

<시지프스>일러스트 : 출처 Gartner blog

까뮈는 <시지프의 신화> 서론에 다음의 구절을 인용한다.


"오, 사랑하는 이여,
불멸의 삶을 갈망하지 마라,
다만 가능성의 들판을 끝까지 내달려라.

- 핀다로스 <아폴론 축제 경기의 축가 3>"


살아 낸다는 것 자체가 존재의 이유며 이것에 대한 유일한 철학적 질문은 '자살'이 되는 것이라는 까뮈의 말이 와닿는 요즘이다. 스스로 목숨 끊어낼 질문을 던지는 것은 극히 철학적이다.


최근 투병으로 반쯤 누워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공상과 끄적임 뿐이다. 그저 살아내는  날들이 개미지옥에서 설탕 덩어리를 밀어 올리는 개미의 미련함으로 보이는  무한 반복의 도전은 결국 생존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굴러 떨어질 운명을 알면서도 큰 바위를 밀어 올리는 무모함과 한결이다. 여러 유혹을 뒤로하고서 그저 한 걸음씩 내 딛는 수도와 같은 순례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스스로 적어가는 일상의 기록은 그 자체로 위대하다. 사유하는 걸음이 빛을 보려는 욕심을 이겨낼 때 비로소 작은 철학의 기쁨을 만난다. 그렇게 살아 낸다.


살아 낸다.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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