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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 스테파노 Sep 11. 2024

가을편지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사랑하는 나의 아내 여니에게 01


사랑하는 당신, 

아직도 무더운 여름날에 휘청이고 계신지요. 추석이 코 앞인데 아직 바람은 선하지 못한 듯합니다. 힘겨운 하루가 저물 때면 서로 등맞댄 생각이 이리저리 몸싸움을 벌이곤 합니다. 오늘도 살아 내었다는 힘겨운 안도도 잠시, 쉬이 잠재우기 힘든 오늘마저 가버린다는 아쉬움이 깊게 배어 옵니다. 그래서 휘청댈 만큼 뜨거워도 여름날을 당신이 늘 그리워하는 이유가 아닐까요.


그래도, 너무 상심 마세요.

도시 빌딩 숲골이라도 가을은 무르녹을 테고, 도로변의 포플러며 은행, 단풍들은 울긋불긋 색을 입을 테니까요. 그러다 보면 그 옛날 학창 시절 김유정 작가가 써 내린 가을 마냥, 이따금 가랑잎이 정신 나듯 부수수 떨어지면 선한 바람이 불어와 이름 모를 화단의 가을 국화들은 그 품에 새뜩 새뜩 넘놀겠지요. 그렇게 가을이 오면 편지를 하겠습니다. 누구라도 그대가 되면 좋겠지만, 단 한 사람 사랑하는 당신만 이라도 읽어 준다면 내 비루한 글에 들인 작은 시간들이 기쁨이 될 겁니다.

가을이 옵니다 (사진=2016년 경주에서)


어느 옛날, 라디오에서 나오던 <가을 편지>라는 노래를 무심히 들었던 그런 옛날이었습니다. 단순한 멜로디에 쉬운 코드로 진행되는 익숙한 그 노래의 지은이를 듣고 깜짝 놀랐던 그 옛날이 생각이 났습니다. 바로 얼마 전 먼 길 소풍 떠난 학전 소극장의 영원한 뒷것 김민기 선생이었지요. 물론 고은 시인의 노랫말에 곡을 붙인 것이라 해도, 그때 들었던 생각은 뜻밖의 놀람이었는지 일종의 배신감의 당혹이었는지 가름하기 어렵지만 아직도 기억에 남는 옛날의 그 순간이 되었답니다.


김민기 선생은 이웃사촌이었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웃팔촌쯤이라고 말하는 편이 맘 편할지도 모릅니다. 옛 기억을 뒤적이자면 말이 참 적고 쑥스러움 가득한 아저씨였습니다. 나의 군 복무 중 보증 부도로 흩어져 살던 가족들은 겨우 남은 자금을 들고 서울 서북의 일산 신도시로 찾아들었습니다.


서울과 잠시 단절된 섬 같은 일산 신도시는 출퇴근을 위해 썰물처럼 사람들이 빠져나간 대로변에서 운전 연습을 해도 될 만큼 썰렁하였고, 모두가 외지인일 수밖에 없는 이곳에서 새로운 이웃과 사촌이든 팔촌이든 유대를 쌓기는 상당한 노력이 필요했습니다. 그때 매일 아침 아르바이트를 위해 버스를 타러 가는 길에 마주친 아저씨가 김민기 선생이었습니다.


보자마자 그 김민기가 내가 아는 김민기라는 것을 알았지만, 당시의 주변머리로는 인사를 건네기도 힘들었지요. 그런 어리숙한 날들이 있었습니다. 그러기를 몇 날을 지나고 그 아저씨가 어깨를 툭 치며 건네준 표 한 장, 바로 학전 소극장에서 하는 록뮤지컬 <지하철 1호선>의 초대권이었습니다. 그렇게 학전에서의 아르바이트가 이어졌고, 그 말 없는 아저씨의 깊은 속을 조금이나마 알게 된 시간을 마주했습니다.


https://brunch.co.kr/@parkchulwoo/904


대학 노래패에서, 시위대 선동대에서, 커튼 내린 소성당 모임에서 그의 노래를 얼마나 불렀을까요. <아침이슬>, <상록수>, <늙은 군인의 노래>에 <친구>까지 어깨동무 어울거리고 힘차게 하늘 위로 주먹질하던 그 젊은 날에 부르던 그의 노래는 빈 몸으로 백골단 곤봉과 최루탄에 맞서던 갑옷이었지요. 그 짱짱한 마음의 갑옷을 노래로 펼친 김민기 선생이 <가을편지> 같은 말랑한 사랑 노래라니요. 이름 모를 외로운 여자가 아름다워 편지를 쓰겠다는 뻔한 듯 뻔하지 않은 고백은 당황스러웠답니다. 비록 다른 시인의 노랫말에 가락을 붙인 것이 다라고 해도, 그 젊고 성기었던 옛날에는 그랬답니다.


시간이 제법 쌓이고 주변에 와글대던 사람들이 사라져 숨어들고 세상에 혼자구나 싶었던 어느 가을날이었습니다. 어두운 방 구석에서 기타를 들어 제법 익숙하게 F코드를 잡아  노래를 읊조려 보았습니다.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노래가 편지가 됩니다. 가을에 선한 바람 불어 들어 들국화들이 새뜩 새뜩 넘놀면 편지를 합니다.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준다면 편지를 합니다. 편지를 한다는 말은 편지를 쓴다는 말 앞에 마음을 더하는 일입니다. 편지를 써서 그대가 되어준 누구에게 부치겠다는 다짐을 더하는 일입니다. 그 다짐이 요란하고 휘영찰 이유는 없겠지요. 그래서 <가을편지>는 담담하지만 제법 처연하게 부르는 노래입니다. 낙엽이 쌓였다 흩어지고 이내 곧 사라지는 가을날. 헤매던 모르는 외로운 여인의 쓸쓸한 고독이 아름답다는 말은 역설이 아니라 진솔한 위로일지도 모른다 생각했답니다.

돌탑을 쌓아 올리듯 편지를 하겠어요 (사진=2016년 가을 경주에서)


사랑하는 당신,

찌는 듯이 숨 가빴던 여름이 해가 갈수록 늘어지고, 찢어질 것 같은 모진 바람 드센 겨울이 점점 앞서 온다 하더라도 너무 속상해하지 마세요. 꽃은 봄에 피워 가을에 진다지만 우리들 꽃밭엔 이 가을에 꽃을 피워낼 소망들이 있으니까요. 그 소망들에 희망이라는 물을 주고 기도라는 거름을 주는 나비가 되겠습니다. 애벌레가 나비가 되는 그 마음으로 이 가을에 편지를 씁니다.


<가을편지> 고은 작시, 김민기 작곡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 주세요
낙엽이 쌓이는 날
외로운 여자가
아름다워요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 주세요
낙엽이 흩어진 날
헤매인 여자가
아름다워요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모든 것을 헤매인 마음
보내 드려요
낙엽이 사라진 날
모르는 여자가
아름다워요
아름다워요

https://youtu.be/Pz9fnk4S9Y0?si=ZrmMvBEyiRk9RaYL

<가을편지>는 1971년 최양숙을 시작으로 신계행, 이동원, 최백호 등 여럿이 불렀다. 개인적으로 원곡자인 김민기가 저음으로 부른 1991년 녹음본을 가장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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