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룩 덜룩한 삶을 쓰고 싶다
(대문 사진=연극 <녹천에는 똥이 많다> 중)
요즘 이런저런 바쁜 마음의 일들이 있었다. 오늘 아침 속이 매스껍기를 넘어 통증의 나날들이 계속되더니 토혈에 혈변을 보았다. 좀처럼 앉아 있기도 힘든 절박의 강박감이 조여 오는 날이다. 애증 하던 비즈니스 보스와 리뷰하던 연말 결산 같은 긴장감 가득인 듯 한 시간이 지속되고 있다. 솔직히 숨이 막혀 버린 느낌이다.
예전 수영을 배울 때 자유형 호흡법, "음~파-"가 그렇게 어려웠다. 비강이 문제였다 작지 않은 코지만 비중격과 비강이 뒤틀려 코의 한쪽은 막혀 있었다. 아직도 그렇다. 나머지 한쪽도 남들의 육칠 할 정도의 성능. 그러니 코로 숨을 뱉어 내는 것은 곤욕정도가 아니라 불가능에 가까웠다. 당시 25미터 풀을 무호흡으로 완주하는 패기 어린 꼼수만 가능했다. 그 기분이 드는 오늘이다.
예전 어느 플랫폼에 글을 쓰고 보니, 작성글이 1,000개가 되었다. 댓글과 이어진 글이 나누지 않았던 시기를 감안하더라도 채운 날들보다 많은 글을 뱉었다. 다른 곳, 카카오채널이나 오마이뉴스, 그리고 포털 상위 노출이라도 된 글은 중복 삭제하기도 했다. 필명을 들어내고 실명을 적었다. 지나고 보니 멍청한 모범생 같은 짓이었다. 그럼에도 1,000이란 숫자가 뿌듯했다. 아주 잠시.
글을 쓰는 것이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하는 일이 되는 순간 괴로워지기 마련이다. 어디 글쓰기뿐인가. 살아내는 순간순간마다 어쩔 수 없는 것이 되어 버리는 모든 애정하는 것들이 있지 않은가. 눈을 기다리는 겨울 공기가 무겁듯이 내 기분도 가라앉았다. 아마도 고마운 전화를 받아서인데, 그 고마운 전화가 설움을 터뜨렸다.
<골목길 카프카>의 저자 고원영 선생님의 전화였다. 며칠 전에 비루한 글 <그들도 우리처럼> 리뷰를 번쩍거리게 포장해서 소개해 주신 이유를 말씀하셨다. 본인은 스물여덟에 글을 놓았다가, 먹고살만해진 쉰셋에 다시 펜을 드셨다고 하신다. 인연 하나 없지만 글이 아까워서 계간지에 영화평론/리뷰를 쓸 수 있게 추천해 주시겠다는 전화였다. 분에 넘치는 감사함이었다. 그런데 마냥 기쁘지 않았다. 두려움도 커졌고 자신도 없지만, 무엇보다 서러웠다.
고 선생님의 말은 겸양의 칭찬일지라도, 내게는 그 말이 위로이자 설움이 되었다. 글이 인정 못 받는 것 같은데, 플랫폼 같은 데서 아등바등 대지 말고 일단 제도권의 뺏지를 달라고 하셨다. 글의 가치는 쌀 몇 말 밖에 안돼도 그 값어치도 제대로 쳐 주기 위해서는 명찰이 필요한 것이라고. 예나 지금이나 글쟁이들의 번민이라는 게 이런 것이라고. 그리고 급하게 쓰지 말고 꼼꼼히 문장을 다듬자고 따뜻한 이야기를 주셨다.
나에게 글쓰기란 무엇인가에 대해 수없는 말들을 이곳에 쏟아 놓았다. 일종의 배설이었다. 제대로 소화되지 않은 설사부터 감당 안될 것을 끄적거린 피똥도 있었다. 즐거움이라느니, 방향이라느니, 참 지어내기도 잘한다는 생각이 들만한 똥을 싸고 있었다. 그렇다. 내 글들에는 똥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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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의 경험으로 비추어 보건대, 외적인 보상은 즐거움에 반비례하고 괴로움에 정비례하는 느낌 반, 확신 반이 들었다. 원하지 않는 뉴스도 '이슈'의 날이 서있는 것 같으면, '선점'을 위해 없는 시간을 쪼개기 일쑤가 되고, 대문에 걸리는 글들과 에디터들의 뉴스'클리핑'에 신경을 쏟아 내었다. 그 콘텐츠의 본질적인 '글'의 품질, 글쓰기의 양태와 문장과 편집이 좋은지는 따지지 않고 공감하는 척 따라갔다. 돌아보니 또 화끈거린다.. -본문 중-
지난 시간에도 부끄러움을 느꼈나 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짱짱한 고무줄 마냥 다시 제자리에 서있다. 글을 쓰랬더니 똥을 싸고 있었다. 물론 글다운 글도 몇 꼭지 되기는 하겠지. 하지만, 글의 방향은 오로지 보상을 향한 처연한 구애였다. 똥이었다. 문장과 사유의 결을 따지지 않고 그저 눈에 띄는 그럴듯한 글자와 사진들로 채워 넣기 바빴다. 내가 가난하지 않다면 똥을 싸지 않고 글을 쓰지 않았을까 하고 되묻는 오늘이었다.
아내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다. 아내가 조심스레 이야기에 답했다. 지금의 힘든 고행이 없었다면 당신의 고뇌와 고심도 없었을 것 아니냐고. 이제라도 갑작스런 곤궁이 사유라는 선물을 준 것이 아니냐고. 똥밭이 언젠가 결실을 이루는 농부들의 땅이 되거나, 요즘 식으로 재개발되어 그럴듯한 동네가 되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냐고 어르고 혼내었다. 그 말에 설움이 멎고 모든 것들에게 감사하고 싶어졌다.
소설 <녹천에는 똥이 많다>에서 동생 민우가 잡혀 간 뒤 똥밭에 주저 앉아 우는 형 준식의 모습은 가슴 저리도록 아팠다. 그의 울음은 그저 신세한탄의 곡소리가 아니었다. 우리 모두에게 던지는 고통스러운 질문이었다. 시국 사범 민우의 등장으로 중계동 똥밭에 세워진 아파트에 사는 준식의 삶은 포장 그럴듯한 거짓이 되어 버렸다. 그럴듯한 고준담론의 음엄한 도식을 벗기고, 처참하고 처절한 진짜 삶을 보게 된 것이었다.
이제 내게 글쓰기는 그런 일이 되었으면 싶다. 처연한 진실이 삶의 무게를 늘려 가더라도, 마주보고 바라보고 보이고 느끼는 대로 써 내리고 싶다. 나는 오늘 내가 싸놓은 똥밭에 앉아 준식 마냥 울어 버린 것이다.가슴 속의 모든 것들이 터져 나오길 바라면서 말이다. 언젠가는 1,000개의 똥들이 거름이 되어 밭이 되고, 그 같에서 듬직한 호박꽃 넝쿨이 엉겨 가기를 바라본다. 설움 끝에 희망을 잡는다.
“그는 울기 시작했다.
그의 눈에서 끊임없이 눈물이 흘러내렸고
그 눈물이 더욱 그를 서럽게 만들었다.
그가 우는 것은 후회 때문도 아니었고
자책감 때문도 아니었다.
그저 가슴이 찢어지도록
자기 자신이 비참하다는 느낌,
아무도 이해 못할,
아무에게도 이해받지 못할
자신만의 슬픔이 그를 울게 만들었다.
아주 오랜 시간 동안
그는 똥구덩이에 엉덩이를 깔고 앉은 채
일어날 생각도 않고
어린아이처럼 소리 내어 울고 있었다.
가슴속에 있는 모든 슬픔의 덩어리가
한꺼번에 터져 나온 듯이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울었다.
너무나 오랜 세월
그의 몸 안에 뭉쳐져 있던 슬픔,
어찌할 수 없는 허망함에
완전히 자신을 내맡기고 울었다.”
-이창동 <녹천에는 똥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