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묵상
부활절이 영어로 Easter day인 이유
부활절은 돌아 가신 할아버지 제삿날보다 따지기가 어렵다. 할아버지 제삿날이야 음력을 잘 헤아리는 어른들이 챙겨 주거나, 음력 달력을 제공하는 캘린더를 보면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부활절은 성탄절과 다르게 지금의 그레고리력의 달력으로 좀처럼 파악하기 힘들다. 대부분의 로마 가톨릭계의 서방 교회-가톨릭 및 각종 개신교, 성공회 등에서는 춘분(春分) 당일 혹은 춘분 직후의 만월(滿月) 다음 첫 번째 일요일로 정한다. 대충 3월 22일부터 4월 25일 사이의 기간 중 어느 일요일이다. 물론 동방교회에서는 다른 기준을 사용하므로 조금 뒤에 오기도 한다.
이런 이유는 크리스마스가 고대 민속 신앙의 ‘태양절’에 의한 유래에서 시작되어 태양력에 유지되는 교회 기념일이지만, 부활절은 농사의 기초가 되는 월력, 즉 달이 차고 오르는 계산에 의해서 결정이 된다. 이런 연유에서 부활절의 통상적인 영어 표현은 Easter Day다. 보통 짧고 서툰 해설은 북유럽의 다산과 풍요를 상징하는 ‘이스터’라는 신에서 이름이 유래했다고 한다. 반 정도만 맞는 이야기다. 게르만 민족의 대표 언어인 독일어의 오스테른(Ostern)과 같이 ‘봄의 계절’과 연관되어 있다고 유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이스터’라는 말은 좀 더 거슬러 올라간다.
고대 바빌론에는 각종 신들을 숭배하는 다신숭배의 문화가 있었다. 이것이 앗시리아와 페르시아, 인도로 이어지는 다신 문화의 근원과 닿아 있다고 설명되기도 한다. 이 바빌론은 대표적으로 태양신, 바알, 월신 등을 숭배했다. 바빌론 왕국을 건설한 니므롯이 죽자 그의 아내 세미라미스는 아들 담무스를 니므롯의 환생이라고 신격화했다. 이 아들 ‘담무스’는 바알, 마르둑, 벨, 오시리스, 쥬피터, 오리온 등 온갖 이름으로 다양한 부족과 민족에 의해 숭배받았다. 담무스의 모친인 ‘세미라미스’는 달의 여신, 월신으로 에오스트레, 오스테라, 아스타레테, 아스다롯, 다이아나, 아데미, 시벨레, 비너스, 마리아, 아슈타르, 아스다롯, 이스터 등으로 불리었다. 바로, 이 세미라미스가 스스로 신격화한 월신인 아스다롯이 이스터의 원류다.
이런 이유에서 태양신을 숭배하는 고대 게르만족에 월신인 이스터가 끼어들어 풍년을 기대하는 축제일로 삼았다. 우리의 ‘청명’과 비슷한 절기다. 게르만에서 파생된 앵글로·색슨이 믿고 있던 봄의 여신도 오스트라라고 부르는데 춘분을 지난 봄의 태양이 땅에 새 생명을 움트게 하고 다산을 준다는 의미로 숭배하였다. 아이러니한 것은 기독교 성경 구약 성경에 나오는 대표적인 이교도가 ‘아스다롯’이라는 점이다.
부활절에 달걀을 삶아서 나누고 먹는다. 이것도 고대 바빌론의 풍습에 기인한다. 고대 바빌론에서는 유프라테스강에 알이 떨어졌고, 여신 아스다롯이 이 알에서 부화했다고 믿었다. 그로 인해 달걀은 거룩한 탄생의 의미가 전이되었다. 이 전통이 부활절 달걀로 이어졌다. 사실 부활절 달걀은 그리스도교의 교리나 전례와는 무관한 일이었다. 부활절 토끼도 마찬가지다. 다산의 여왕 에오스트라 여신이 겨울에 얼어 죽게 생긴 새를 살려 토끼로 변신시켜 주었는데, 이 토끼가 계속해서 알을 낳아 번식을 지속했다는 신화에 근거한다. 이 또한 기독교 교리와는 무관하다.
여기에 서유럽권의 원류라고 생각이 되는 로만-그리스어계의 파스카(Pascha)를 통해 헤브루어인 페사흐(Pesach)에 연결되어 결국 유대교의 유월절(逾越節, Passover)과 맥이 닿는 의미가 융합되었다. 유월절은 모세의 출애굽 마지막 단계인 ‘모든 맞이를 죽임’을 피하고자 이스라엘 민족들이 문지방에 제물로 드린 염소와 양의 피를 발라 죽음의 천사가 ‘지나치게 만든 날’이다. 이는 파라오의 항복을 받아 낸 계기가 되었다. 이집트에서의 노예 생활에서 벗어나 해방된 데 대한 감사의 축제이며, 후대에 전통적인 봄의 수확 축제가 결합하여 있는 절기다.
그래서 부활은 성탄과 달리 교회력에서도 ‘절기’와 ‘주기’로 여긴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시기가 이 시기와 일치되어 연결된 이유는 기독교가 고대 소수 신앙에서 민중들의 대중 종교로 발전하는 단계에서 발휘한 ‘보편적 합치’에 대한 결과물이다. 각 민족과 부족의 전통적인 관습과 전례를 존중하되, 그리스도의 존립 이유인 ‘부활 사건’을 접목한 결과다. 이런 이유로 기독교는 세계화에 성공했다.
'모세의 기적‘으로 이집트에서 탈출한 이스라엘 민족은 광야 생활을 하면서 어려운 고행길을 걸었다. ‘기네스 바네아 사건‘ 같이 가나안 땅이 보이는 곳에 다다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느님을 잊은 채 가나인들이 섬기는 신을 숭배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무서운 하느님‘이 호출되었다. 2년으로 예정된 노정이 38년이 추가되어 40년을 광야에서 방랑하게 되었다. 자기 입에서 나온 말들이 자신들에게 돌아와 땅이 갈라져 죽고, 불에 타 모든 것이 소멸하기도 하고, 불 뱀, 역병, 전쟁으로 수많은 목숨이 죽어 나갔다.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출애굽의 1세대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한 채 죽었다.
‘부활’이라는 말이 너무나도 무겁고 심오하다
부활(復活)이라는 말은 한자 풀이로 ‘다시 생기를 띈다’라는 의미다. ‘환생’과는 다른 말이다. 한국에서 reborn 같은 영어를 무턱대고 ‘부활’로 중역한 오해가 쌓인 듯하다. 불론 80년 대의 록 밴드 ‘부활’의 첫 앨범에는 ‘born again'이라고 당당히 쓰여 있으니 말이다. 사실 reborn의 의미는 두 가지다. 후회가 거듭되어 처음부터 다시 태어나고 싶을 때가 있다. 그때 엄마 뱃속으로 다시 들어가 새롭게 생을 다시 시작하는 것의 의미가 깊다. 불교의 환생이 곧 다음 생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결국 ’다시 태어남‘에 방점이 있다. 그리고 한 가지는 성경에 나타난 ’라자루스(라자로)의 환생‘이다. 거의 썩어 가던 시체 라자로가 예수의 부름에 잠시 깨어난 비유가 전해진다. 이것이 ’라자루스 신드롬‘이라고 사후에 깨어나는 의학적 신드롬에 전해 졌다. 이렇듯, 그저 ’다시 태어남‘은 예수의 부활과 다른 이야기다.
예수는 33세의 청년에 죽임을 당하고, 다시 살아나며, 자신의 부활을 알리고 승천하였다. 그리고 그를 기념하여 드리는 제사(의식)가 바로 미사이고 예배다. 종교를 얕게 아는 부류들이 ‘예수의 부활이 기독교의 필수 조건’이 아니라고 하던데, 완전히 틀린 이야기다. 기독교는 ‘그리스도교-Christ region'의 한자어 음차다. 즉 ’예수‘가 첫 번째 메이아이며 이 메시아가 다시 올 날(재림)을 믿는 것이 신앙의 핵심이다. 즉, 예수가 죽임을 당하고 다시 살아나 승천했다는 교리가 없으면 기독교가 아니다. 참고로 유대인들은 예수를 ’사기꾼‘으로 치부한다. 그리고 아직 메시아는 한 번도 온 적이 없다고 믿는다. 이런 의미에서 ’유대교‘를 ’기독교‘ 계열로 분류하는 일은 정말 코미디다.
여기에서 신앙의 최대 딜레마에 빠진다. ‘부활’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것일까? 정말 죽도록 고문당한 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이가 멀쩡하게 살아나 제자들을 만나 재림을 약속한 것이 과학적으로나 상식적으로 타당할까? 이 ‘부활’이라는 어마어마한 인류의 최대 사건을 두고 신앙의 갈림길에 빠져 선택하게 된다. 기독교를 비판하는 이들이 가장 많이 비판하는 지점이며, 마치 개혁 기독교라 이야기하며 이를 부정하고 다른 교리를 설파하는 사이비들의 빌미가 되었다. 솔직히 모태 신앙인 스테파노에게도 부활의 신비는 매우 어려운 교리다.
신약 성경에 예수가 행한 여러 기적이 묘사되곤 한다. 가나안의 포도주부터 물 위를 걷는 기적까지. 그중에서 사람들의 해석이 가장 다양한 것이 ‘5병2어’로 알려진 물고기 다섯 마리와 빵 두 개의 기적이다. 산중에 설교를 들으러 온 군중들을 먹이기 위해 예수는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내어놓자고 이야기하지만 아무도 선뜻 내놓지 않았다. 이때 어린아이, 아마도 예수의 기도가 간절했던 불행한 아이가 자신의 먹을거리를 내놓자, 예수는 이를 들어 하늘을 향해 기도하고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한다. 그 결과 12 광주리가 차고도 남는 음식들이 다시 남겨졌다. 이를 어떤 목사나 신앙인들은 ‘예수가 영험한 능력으로 빵과 물고기를 증식시켰다’라고 이야기하지만, 그대로 믿기는 힘들다. 가장 유력한 해설이 가장 낮은 이가 내놓은 식량을 들어 사람들에게 보여주자 사람들이 자신들이 감추어 놓은 끼니를 서로 나누었다는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예수의 기적은 빵 하나를 천개로 만드는 능력이 아니라, 사람들이 스스로 자신의 것을 내어 줄 용기와 희생을 품게 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부활로 돌아와서 ‘5병2어’의 비유를 들이대어 보지만, 쉽지 않다. 죽은 사람이 벌떡 일어나 큰 돌을 밀어내고 제자를 만나며, 엠마오로 가는 이들은 알아보지도 못한다니 말이다. 도마의 의심이 이해가 가고도 남을 부분이다. 남들보다 조금 깊은 신앙생활 중에 이 부분이 늘 묵상 거리였다. 그러다가 영어의 표현을 찾아보았다. 우선 부활은 앞서 설명한 Easter Day가 보편적이다. 그리고 공식적인 표기로는 ‘Resurrection’이라고 되어 있다. ‘리저렉션’으로 읽히는 이 단어의 의미는 무엇일까? ‘다시 살아난다’라는 의미일까? 아니다. ‘리저렉션’의 의미는 ‘다시 일어난다’라는 의미다.
surrection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융기(隆起, uplift)’라고 되어있다. 융기는 자연적인 원인에 의해 어떤 지역의 땅덩어리가 주변에 비해 상대적으로 상승하는 일을 말한다. 부산 태종대나 동해안의 정동진이 대표적인 융기 지형이다. 즉 부활은 ‘재-융기’라는 뜻이다. 우리말로 ‘다시 일어섬’, ‘다시 솟아남’이 적당하다.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헛된 소망이 깃든 ‘환생’이 아니다. 그리고 그저 시체가 눈 뜨고 살아나는 기이한 자연현상도 아니다. 부활이란 ‘다시 일어서는 모든 것을 위한 응원’이다.
‘부활’은 고통의 의미를 깨닫는 일
부활은 충분한 고통이 만들어내는 자연스러운 결론이다. 부활의 전제 조건은 죽음이다. 그리고 예수의 부활이 우리에게 큰 의미를 주는 이유는 그 죽음이 너무나도 억울하고 참혹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일상에 빗대어 본다면 비루하고 처참한 고통이다. 이런 이유에서 ‘부활’을 이야기하려면 ‘고통’이 앞서야 한다. 누군가 고통이란 말 없이 설교하고 강론한다면 그들은 모두 가짜다. 부활을 진주라고 비유한 배철현 교수의 말이 와닿는 지점이다. 찬란하고 고귀한 진주는 연체동물이 자기를 위협하는 존재에 대해 방어할 때 서서히 만들어 내는 결과다. 계속되는 외부의 공격을 겪어 내고 그 충분한 고통의 의미를 깨닫게 되는 일이 부활이다.
청년 예수는 고난이 다가오는 것을 직감하고 스스로 광야로 들어섰다. 수 천 년 전 선대들이 광야에서 방랑한 것을 되뇌듯 스스로 고통의 시간을 선택했다. 광야란 아무것도 없는 땅을 말한다. 광야에서는 어떤 것도 무용이 된다. 씨를 뿌릴 수도, 추수할 수도 없거니와 무슨 노력을 해도 이루어지지 않는 곳이다. 절망만 가득한 곳이 광야다. 선대의 조상들이 이 광야에서 40년을 버틸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를 예수는 고민했다. 그 비법은 다른 것이 아니라 ‘믿음’이었다. 그 믿음에 부합하여 하느님은 만나를 비처럼 내리고, 큰 돌에서 물을 찾게 만들고, 메추라기를 먼지처럼 내려 주었으며, 불기둥을 만들어 추위를 막고, 구름 기둥으로 뜨거운 햇빛을 막아 주셨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경험하고도 이스라엘 백성들의 믿음은 흐릿해졌다.
약속의 땅은 보이지 않고 눈앞의 갑갑함만 보이게 되자 원망을 내놓았다. 그러나 이 아무것도 없는 절망을 통과시킨 것은 모두 하느님의 의지이자 보살핌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망각의 동물이었다. 큰 꾸짖음을 경험하고서야 다시 믿음을 찾았다. 그리고 가나안 땅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다시 자기 아들 예수를 보내 부활을 체험함으로써 ‘광야의 교훈’을 일깨웠다. 시간이 흐른 후 사람들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자본이라는 우상을 숭배하고 권력이라는 미신을 받들고 있다. 그리고 스스로 ‘믿는 사람’이라는 자들도 서로 자신의 교리와 전례가 아니면 가짜라며 배척하고 배제하기 바쁘다.
예수는 죽음을 맞이하기 직전 인간적인 번뇌를 내 쏟았다. ‘렘마 렘마 렘마 사 박 타니’라는 아람어인데, 이는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는 의미다. ‘렘마’가 흔히 ‘왜’로 번역이 되기도 하지만, 성경학자들은 ‘무엇을 위하여’로 번역해야 정확하다고 이야기한다. 다시 말해서 예수조차도 그리스도 이전의 청년 예수의 모습에서 ‘무엇을 위하여 내가 죽어야 합니까?’라고 물은 셈이다. 부활은 이런 ‘고통’이 먼저 수행된 일종의 결과물이다. 과학 기술이 발전한 지금 우리의 시대에 ‘무엇을 위해 부활을 생각해야 하는가?’ 를 스스로 물어야 하는 일이다. 부활은 충분한 고통과 그 고통의 의미를 깨달은 사람에게 주는 선물이다.
톨스토이는 <부활>의 한 대목에서 ‘인간이란 흐르는 강물과 같다’고 적었다. 강물은 시내가 모여 흐름을 만든다. 같은 강이더라도 강물은 어떤 곳은 넓고 물살이 잔잔하지만, 어떤 곳은 매우 좁고 거세게 빠르게 흐른다. 어떤 곳은 맑고 투명하지만, 어떤 곳은 흐리고 혼탁하다. 어떤 곳은 따뜻함이 남아 있지만, 어떤 곳은 모질게도 차갑다. 그런데도 강물은 어디에든 같은 강물이다.
톨스토이의 작품에서 누가 ‘부활’을 깨달았을까? 누가 ‘부활의 선물’을 받았을까? 하층 계급의 설움으로 범죄를 저지른 카추샤일까? 아니면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나누며 속죄하려는 네플류도프일까? 이런 생각에서 학부 시절 톨스토이를 이해하려 해 보았지만 쉽지 않았다. 가진 것이 많은 자가 가진 것을 포기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아니면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 마지막 하나를 내놓는 것은 그에 비해 어떨질에 대한 비교 비판이 거듭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이가 들고 사순시기에 다시 집어 들어 드문드문 살펴본 <부활>은 다른 말을 하고 있었다.
인간은 누구나 모든 특성을 맹아처럼 품고 있다. 어떤 경우와 상황에서는 이런 특성이 또 다른 경우와 환경에서는 저런 특성이 싹을 틔우기 마련이다. 이런 의미에서 성악설과 성선설 구분은 매우 의미 없는 논쟁처럼 느껴졌다. 선한 사람이란 좋지 않은 부분을 최대한 줄이고 억제하여 튀어나오지 않도록 연마하고, 더 나은 부분이 늘어나도록 애쓰는 자다. 본디 악하고 선하고의 판단이 중요하지 않다. 지금 자신의 주어진 환경에서 얼마나 애쓰고 있는지가 중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카추샤든 네플류도프이든 ‘애쓰고 있는 노력’에 ‘부활의 선물’이 다가선다고 믿는다.
‘어제 보다 조금 더 나은 오늘’이 있다면, 부활은 온다
요즘 여러 일로 마음이 힘들었다. 내 비루하고 보잘것없는 병과 가난은 이력이 되어 이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가 되었다. 아주 어릴 적 가난한 일곱 살 아이가 느꼈던 가난으로 인한 모든 배척이 떠 올랐다. 용돈은커녕 머리 자를 여유도 없는 내게 친구의 생일파티란 무척이나 가고 싶지만 가서는 안 되는 장소였다. 유치원 시절 딱 한 번 모친의 만류에도 50원짜리 라면땅을 사 들고 찾아간 생일파티에서 문전 박대를 당했다. 생일 주인공의 사촌인 나보다 머리가 하나는 더 큰 녀석이 입구에서 생일 선물을 검열했다. 보통 크레파스, 색연필, 연필 세트, 그리고 스케치북들이 선물이 되었다. 내가 내민 라면땅을 본 녀석의 웃음과 가서 너나 먹으라던 말은 아직도 기억에 선하다.
나이 쉰하고 두 살에 일곱 살 적의 그 느낌이 들었다. 막상 속상했고 타인들이 세상에 화가 났다. 그러나 이 엄청난 고통 속에서도 기적은 찾아서 든다. 아직 살아 있다는 것 그 자체가 기적이 아닐까 싶다. 어느 때보다 가슴 저민 성주간과 성삼일의 고난 주간을 보내고 부활을 맞이했다.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부활’이 무엇인지 알게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바로 고통을 인내하여 ‘다시 일어서는 것’이다. 후회를 거듭하여 ‘다시 태어나길 바라는 마음’은 나답지 않은 비겁한 생각이다. 모든 것을 잊고 환생하기를 바라지 않는다. 이 고통을 선명하게 기억하며 다시 일어나길 기도한다. 내 간절한 기도는 이처럼 구체적이다. 그래서 오늘부터 다시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