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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 스테파노 May 16. 2024

1장 - 하얀 현기증(1)

2023년 12월 28일

눈이 부셨다. 백라이트닝이 고장 난 티브이 화면처럼 온통 세상이 환하게 보였다. 빙글빙글 돌던 작은 원룸 천정이 이내 곧 좁은 차 안으로 이어졌다. 여기는 어디인가 싶은 마음에 온 힘을 다해 귀를 쫑긋 세우려 힘썼다.


"BP가 불안정해요.
산소 포화도가 떨어져 있으니
산소를 달겠습니다."


착장을 보아하니 119 응급 구조사인 듯했다. 이내 코에 투명한 튜브를 꽂아 달았다. 검지 손가락에는 집게 같은 측정 장치가 달려 있었다. 좌우를 힘겹게 둘러보았다. 그리곤 이곳이 어디인지 감을 잡았다.


구급차 안에는 그리 멀리 가지 않아 가까운 종합병원 응급실에 도착했다는 말이 퍼졌다. 침상을 구급차에서 미끌리듯 내리고 어디론가 들어가는 자동문의 열림 소리가 들렸다. 그리곤 두서너 명이 동시에 말하기 시작했다. 어지럼증은 한계를 넘어서 혼이 있다면 육제를 이탈해 침상을 지나 바닥 밑으로 꺼져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멜라니아(주; 혈변)를 일주일 동안 보셨고, 토혈도 오늘 아침에 있었다고 합니다.
현재 맥이 약하고 산소포화도 떨어졌는데
최근 한 달 동안 복통에 소화부진이
지속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응급 구조사와 의료진이 나누는 대화는 점점 멀어져 가고 내 손을 꽉 잡은 아내의 손길도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졸음인지 기절인지 가늠하기 어려운 무기력이 덮쳐왔다. 힘을 내야 할 것 같은데 힘 내기가 싫을 만큼 모호한 귀찮음이 자리 잡아 버렸다. 응급실에 실려온 것이 처음은 아니지만 이런 무력감은 생소하기 그지없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감은 눈을 뜨니 응급실 가장 안쪽의 침상에 누워있었다. 이미 팔에는 정맥라인을 잡아 수액을 달아 놓았고, 의료진이 검사를 위해 채혈을 하겠다며 다른 팔의 혈관에 바늘을 넣었다. 그리곤 CT검사가 있을 것이라며 잠시 대기하자는 말이 들렸다. 호기심인지 보호본능인지 침상에 누워 주변을 둘러보았다. 목을 돌리기 힘든 곳은 최대한 눈알을 굴려 살펴보았다.


'고위험군-낙상주의'라는 노란 경고판 같은 안내가 침대 발밑에서 반뜩였다. 주변의 침상을 둘러보니 대부분이 비어 있었다.


'응급실 유랑이 다반사라던데 여유롭기만 하고만,
여하튼 보도나 미디어는 늘 블러핑이구만.'


 경황 파악 어려운 사달 중에도 장기 훈수질은 좀처럼 잦아들기 힘들었던 모양이다. 아니 현실 파악이 되지 않는 상상과 공상 밖의 상황에 잔뜩 겁을 먹고 반사적으로 너스레를 떨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생각이 깊어질 기력마저 소진되고 있었다.


그때  손을   아내의 눈은 붉게 달아올랐고 연신 '괜찮아'라는 말은 역설적으로 불안하고 두려운 마음이 스며들었다. 그제야 핀트 맞추듯 현실의 포커싱을 찾았다. 불길한 공상은 현실이 되기 십상이듯,  것이  버렸다.


전공의인지 수련의인지 가늠 어려운 젊다 못해 어려 보이는 의료진이 코에 튜브를 밀어 넣었다. '꿀꺽꿀꺽 침 삼키듯' 삼켜 보라는 주문이 쉽지만은 않았다. 겨우 위까지 내려간 튜브를 통해 의사는 앰부 펌프질을 연신해 대었다. 뱃속으로 찬 기운이 싸악 퍼졌다 거두길 반복하자 눈앞에 놓인 큰 비커에 옅은 적갈색이 번져 나갔다. 그리고 바닷속 해초 같이 기다란 무안가가 소용돌이치는 비커에서 살랑대었다.


"마지막 식사는 미역국 드셨나 봐요?
출혈은 일단은 멈춘 것 같은데 정확한 검사를 위해 내시경 검사가 꼭 필요합니다.
진정 내시경은 비보험이지만, 현재 상태를 고려해 가능하시면 비수면으로 진행하시죠. 괜찮겠습니까?"


나름 소신 있는 의견 개진을 보아 적어도 전공의 선생이라는 판단을 습관적으로 내리고 그렇게 하겠다고 작게 끄덕였다. 사실 고민이 짧지만 깊게 스며들었다. 응급 검사에 수면 진정제 사용이면  수만 원은 쉽게 깨질 테니까 말이다. 그렇다고 검사를 거부할 상태도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기 때문이다.


묶여 있는 동결 자산은 수년째 꿈적도 못했고, 여유라고는 겨우 끼니를 버틸 만큼, 더욱이 수개월 밀린 숙소 대금 때문에 당장 방을 비워 주어야 했던 현실이 머리에 맴돌았다. 병원비는 공단 대납이나 추후 후납으로 가능하다는 경험이 있기에 일단 원인을 찾아 궁여지책의 가장 하수로 대응하려는 마음이 일었다.  와중에 말이다.


응급실은 한산한데 의료진들은 분주해졌다. 혹시 나 하나 때문일까 하는 과대망상이 현실이라 깨닫게 되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또 다른 의사가 내게 다가서서 다소 격앙된 어조로 다그치듯 이야기를 쏟아 내면서 설마가 사실이 되었다.


"환자 분! 검진받으신 지 얼마나 되셨어요?"
"최근 체중감소, 발한, 오심, 현기증
같은 것들을 느끼셨다면서
병원에 갈 생각은 하지 않았나 봐요?"
"강직척추염 진료는 왜 중단하셨어요?
일반 의약품 진통제 말곤
드시는 약제는 없으신가요?"
"지금 상태가 얼마나 심각한지
모르시는 것 같은데
왜 이렇게 방치한 거예요?"


몰아치는 질문은 마치 기소를 위해 집요하게 엮어내는 검사의 신문처럼 들렸다. 내 형편이, 내 상황이, 내 여유가 병원 진료는 우선순위가 될 수 없었다는 구차한 대답이 가슴 밑에 일렁였지만 내뱉을 수 없었다. 기력이 달려서 그럴 수도 있고 당황스럽게 몰아붙이는 질문에서 틈을 찾을 기민함도 잊은 지 한참이라서 그랬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음에 나오는 의사의 말은 슬로 모션을 걸은 하이라이트 영상처럼 내 전두엽을 후려치고 말을 잊게 만들었다.


"혈액수치 중 적혈구 수치인
헤모글로빈 수치는
일반 성인 남성의 절반이에요.
혈변, 토혈 증상으로 보아
내출혈이 의심되니 추후 검사로 찾아내고,
우선 수혈을 하겠습니다."


뭐 방안이 빙글빙글 돌만큼 어지러웠으니 예상 못할 일도 아니었다. 그 와중에도 수혈은 보험이 되는지, 비용은 얼마나 할까 하는 걱정이 먼저 앞장섰다. 그 걱정은 곧 이내 사그라들었다. 비현실의 현실성이라는 포스트모더니즘 같은 전위적 상황이 내게 다가섰기 때문이었다.


"더 큰 문제는 백혈구 수치인데,
보통 성인 남성의 수치가
4,000에서 10,000이에요.
환자 분은 400,000 가까이 나왔어요.
그리고 엑스레이상 비장도 커져 있어요.
보통 10센티 정도인데
24센티가 넘게 비대해져 있더군요.
이렇게 되기까지 뭐 하시느라
검진도 안 받으셨는지 모르겠지만
심각합니다."


의사는 한숨 고르더니 사망 선고라도 하듯 비장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백혈병이나 다른 혈액암이
강하게 의심 듭니다.
이것은 전문의 선생님이
다시 판단하실 거예요.
혈종과(주; 혈액종양내과) 선생님이나
교수님이 오셔서
자세히 설명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뒷 말이 페이드아웃 되듯 멀어져 갔다. 응급실에 실려 오게 된 현기증이 다시 일었다. 눈앞이 컴컴해지기는커녕 세상이 온통 하얗게 포커스 아웃되며 눈을 환하게 가렸다. 하얀 현기증이 나를 다시 덮쳤다.

하얀 현기증을 표현한 playground AI



-아마도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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