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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 스테파노 Feb 09. 2024

늦은 인사드려요

항암을 시작하며

흐드러진 꽃이 아직이라고 낙심 말아요.
봄은 꽃이 활짝 필 때가 아니라
추운 겨울이 깊고 깊어지면 오니까요.


길고 긴 겨울밤 한숨 깊었습니다.

지난해 말 쓰러져 응급실로, 다시 서울의 3차 병원으로 전원한 끝에 확정 진단을 받게 되었습니다.


'만성골수성백혈병(CML)'이라는 확진명으로 중증환자 등록도 되었고, 무엇보다 치료계획이 세워져 이제   항암의 여정을 시작하게 되었네요.  옛날 영화 <브스토리, 1976> 주인공이 걸린  병으로 5 이내 사망하는 '불치병' 대명사인  병입니다. 다행히 2001 '기적의 탄환 (miracle cancer bullet)'이라 불리는 표적항암제의 개발로 지금은 기대수명 84% '성작 좋은 '으로 변모하게 되었습니다. 어려움과 인내의 시간이 기다리고 있지만 희망을 가늠할  있습니다.


강직척추염으로 병원을 마지막 간 것이 2020년 초였으니, 아마 그 후 발병해 1~4년 정도 만성기를 보내고 작년 말에 가속기, 급성기의 신호가 와서 위장 내 다량 출혈이 있었다는 의사의 말에 그간의 고된 시간들이 수긍되었습니다. 2차 병원 의사는 짐작으로 처방 없는 진통제의 상습 복용으로 위출혈이 있다 했으나, 혈액암 최고 권위기관인 서울성모병원 담당의는 '백혈병 가속기의 영향'으로 출혈이 되었다며, 다행히 골든타임에 가까스로 턱걸이하였다고 하더군요. 모든 일에 기꺼이 감사드리는 요즘입니다.


대부분의 환자들은 증상 없이 건강검진에서 이상소견으로 내원하여 경구 항암제 복용으로 '관리'되는 병이지만, 저와 같이 내출혈 등 사달이 나고서야 발견되는 경우는 드물지만 어려운 케이스라고 합니다. 그럼에도 400,000에 달하던 백혈구 수치(정상 4,000~10,000)는 엊그제 수치로 3450으로 떨어뜨리는 데 성공했습니다. 암이 전이된 조혈모세포가 신호체계가 고장 나면서 쓸모없고 제 기능 못하는 백혈구를 다량 만들어 제대로 된 혈구들의 자리를 빼앗는 과정을 막아내는 것이 치료의 목적입니다.


문제는 효능 없이 넘치던 것들을 줄이기 위해서는 극단적으로 덜어 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최초 세포독성항암으로 암세포는 물론 성장세포는 모두 죽이는 작업을 하여 몸속의 혈구들을 모두 비워내는 일을 하고, 그 후 표적항암제로 더 이상 돌연변이 유전자 결합이 없도록 만드는 과정을 평생 거쳐야 합니다. 예후가 좋다면 3~8년 이내에 정상적인 일상회복이 가능하다니 기대를 하며 치료에 열심히 응하고 있습니다. 다만 혈구 감소라는 항암 반작용이 심해 1~2주에 한 번씩 수혈을 하게 되고, 비워진 백혈구 호중구 때문에 면역이 '아기' 상태로 돌아가 모든 감염에 취약하여 대략 1년은 두문불출해야만 하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오심, 구토, 발진, 통증은 견딜 만 하지만 떨어지는 체력 때문에 생기는 무기력은 좀처럼 이겨내기 힘들더군요. 그래도 잘 이겨내 보려 합니다.


사랑하는 아내의 수고스러운 간호로 용기를 찾아가는 중입니다. 최중이 65.4kg까지 떨어진 근력을 회복하기 위해 병원밥이든 간식이든 잘 먹으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다행히 병원이 가톨릭 재단이라 매일 성당에 있는 느낌이 있어 자연스럽게 잊었던 기도를 찾았습니다. 그간 제법 낸 건보료가 아깝지 않을 만큼 특례도 있고, 조직과 프로세스에 신뢰가 있다면 강한 로열티가 있는 성격이라 복약 순응도가 가장 까다로운(공복 3시간 중간 시간에 12시간 간격 투약) 항암제를 선택받아 칸트 같은 일상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제 자신에게 오롯이 집중해 본 적이 살면서 처음이 아닌가 싶습니다. 신체의 모든 반응, 생각과 감정의 모든 순간을 세심히 관찰하고 기록해 냅니다. 축구니 정치니 하는 세상의 이슈들은 이제 스쳐가는 백색 소음이 되어 버렸고, 무언가 해내고 무엇을 이루고자 하는 세속의 욕망도 무디어졌습니다. 그저 살아내고 버티고 이겨내서 수고 가득한 아내가 잃어버린 웃음을 찾아 주고픈 마음뿐입니다. 항암 중인 환우들은 스스로 '암 생존자'라고 부릅니다. 서바이벌 중 가장 치열하고 치명적인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살아남은 자신에 대한 격려이자 응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게 저는 '생존자'가 되고 있습니다.


이제 시작입니다.

그래도 그간의 엄청난 일에 처했을 때 진심으로 응원해 주시고, 실질적으로 도움 주신 많은 분들께 감사의 인사와 마음을 면구스럽게도 이렇게 드립니다.


 살아내 보겠습니다. 아직도 많은 응원과 격려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염치없이 부탁드립니다.

행복은


설날이 설날이라 불리는 이유는 여러 가지라고 합니다. 새로움에 모든 것이 낯설게 느껴져서 설날이라는 이야기, 한 살 늘어가는 시간의 야속함에 서러워서 설날이라는 이야기, 시작이라는 의기투합으로 설렘 가득해서 설날이라는 이야기, 그리고 모든 일에 삼가야 하는 시기라서 삼가는 살이라는 말이 설이 되었다는 이야기. 어찌 되었든 설날은 의미도 나름 나름의 것인가 봅니다.


나름 나름의 소동 속에서 고만 고만한 행복을 진심으로 담아가는 설날이 되시길.

이겨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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