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프카식 성급과 나태에 관하여
(예약 발행이 미숙해 오류가 있어 다시 올립니다)
비참한 사람이란
자신이 행복한지 불행한지를
생각할 여유가 있는 사람이다
-조지 버나드 쇼-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의 작사가 류근의 페이스북에 쓰여 있는 말이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름만 조낸 유명할 것 같은' 버나드 쇼의 말에 글 걸음을 멈추었다. 지리멸렬의 상태와 쓸데없는 생각, 이를테면 걱정 따위의 과잉을 동시에 야유한다고 해석도 달았다. 뜨끔. 그 야유가 내 두 눈을 통해 귀에 꽂히는 듯했다.
처지가 불행하다 하며 붙들고 있는 미련의 중생은 모두 비참한 것이다. 진짜 자신이 처한 상태가 무엇인지 가늠하기도 어려운 탓에 무언가 해 보지도 않고 그저 자빠져서 가늠이나 하는 '여유'가 생긴다니. 가슴 저리게 시린 진실의 싸대기가 아닐 수 없다.
세상의 관심사를 이리저리 끌어들여 뭐라도 말이 된다는 사람들, 자리가 자격이라 생각하는 자들을 개탄했다. 그 말속에 빈정거림이 있음을 쉬이 눈치채고 또 말을 만들어 낸다. 이런 것들이 시인이 말한 "속 빈 말들의 범람"이 아닌가 싶었다. 그들끼리는 "담론"이라 부르는 빈 쭉정이의 단어 나열들. 나도 이해한다. 읽지 않고 보기부터 하는 성급한 시대라는 것을. 글을 읽는 것과 보는 것은 첫걸음부터가 다른데 말이다.
노인정이 되어 버린 요즘 페이스북 담벼락에서는 때 아닌 논쟁과 말싸움이 화제다. 일 년에 책을 800권이나 읽는 다독가와 나름 율사이고 진보 전사라 자처하는 심독가의 '독서 논쟁'부터, 세상만사 만물박사 같은 어느 다설가와 작가라는 타이틀로 기자 시절을 부각하는 유명 서평가의 '담론 전쟁'까지 소란스러웠다. 거기에 더해 자신의 견해로 품평과 채점까지 하는 면전 훈수질도 못할 배짱의 안방 심사위원들의 아우성으로 피로를 불러일으켰다.
논쟁이 나쁘다는 말이 아니다. 그 논쟁과 토의, 토론의 자세가 꼴불견일 뿐이다. 쟁점의 중심이 되는 담론의 인식론적 정의나 논리의 전개는 온 데 간데없고, 온통 화자와 메신저에 대한 이야기로 인상 비평을 할 뿐이다. '네 이야기는 알겠는데 태도가 맘에 안 들어'라는 식의 태도만사주의부터, '난 책도 이 만큼 읽고, 썼고, 타이틀도 이렇게 많아'라는 "내가 해 봐서 알아"식의 전지적 시점의 관전평까지, 그야말로 가관이다. 이것은 논쟁이 아니다. 그저 웅얼거리는 관객은 듣지도 않을 의미없는 방백일 뿐이다.
읽지 않고 듣지 않고 말부터 하고 싶어 하는
"성급과 나태(카프카)"가
뭐 비단 SNS에서만 벌어지는
현상은 아닐 테니까.
낮은 수위의 일반론을 이야기해도
다 자기 이야기처럼 해석되는
'피해망상 증후군'이
어제오늘의 일은 아닐 테니까.
-류근 시인 페이스북 중-
카프카식으로 말하는 '성급과 나태'의 시대에 나름의 존재의 이유를 찾는다. 내 삶이 초라하고 비루하게 버티어 내는 보잘것없음이라도. 걱정과 생각의 과잉으로 사슬을 끊어 낼 시도조차 않는 이들과 느지막이 인지하여 버둥거리는 모든 존재와의 더불어 뒹굴이야 하니까.
시인의 말처럼 지킬 신념이 있다면 의지와 애정을 보여 주고, 바꾸고 싶다면 그 바뀐 세상의 희망과 철학을 보여 주면 된다. 속 빈 말들의, 의미 없는 숫자와 그래프의, 이리저리 그어 놓은 선에 키 재는 일은 거두어 두기를. 나태한 주제에 성급하기까지 하면, 독서와 공론은 온 데 간데없고, 온통 문맹들의 눈먼 자들의 세상이 기다릴 뿐이다.
손에 접히는 일상과 삶이 답인데, 그럴 듯 한 속이 텅 빈 말들은 목적 없이 이리저리 날뛸 뿐이다. 무슨 말인지 알아먹지도 못할 말들에 '좋아요' 하나도 사치다. 불행에 대하 사유할 여유조차 없는 간이역의 모든 순례자에겐 사치다. 이런 글자 하나하나가 사치일지도.
"우리가 오늘을 무엇이라 부르든 간에 이미 변화는 시작되었다."는 영화 <그들도 우리처럼>의 마지막 대사가 귀에 남았다. 어제를 절망이라 부르든 내일을 희망이라 부르든 간에 기차는 매일 간이역에 멈춘다.
브런치에는 글들이 넘쳐난다. 글을 잘 써서 내 보임에 대한 욕구는 아름다운 시작이 된다. 그러나 초심이 곧 오만이 되는 것은 일순간이다. 내 보임이 쓰는 일보다 우선이 되기 십상이다. 어느 요일, 어느 시간 대에 올려야 구독자가 많아질지, 어떤 주제와 어떤 문체로 써야 에디터와 출판 관계자들의 눈에 띄는지. 그럴듯한 글을 올리기 위해 무얼 배워야 하는지 성급함이 밀려오기 마련이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본다면 그 '성급'의 다른 말은 '나태'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깨달을 수 있다. 보다 쉬운 길을 찾으려는 성급함은 궁극적으로 시간의 섭리 앞에선 나태해질 수밖에.
글쓰기는 가르칠 수도 배울 수도 없는 비밀 아닌 비밀이 있다. 글쓰기에 대한 열정으로 배움을 나누는 이들을 싸잡아 비판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최소한 진짜들은 그것이 휘청대는 중심 잡기의 보조바퀴일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을 테니까. 그래도 이따금 진짜 글들을 만나는 순간에 감사드린다. 성급하지 않되 게으름도 아닌 사유와 글쓰기는 늘 아름답다.
글에 대한 여러 이해에 대한 갈급을 '문해력'이라 애써 고급지게 이야기하지 않으련다. 그냥 오독과 과대해석이라는 나태와 성급의 까막눈들에게 이런 설명도 아까운 날들이니까. 쓰지 않으면 안 되는 삶이 있다. 그 삶을 살아 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