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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단편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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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이로운 Sep 19. 2016

아빠와 레인 부츠

   “다녀왔습니다!”

   현관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딸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남편이 식탁 뒤로 의자를 쭉 뺐다. 의자 다리 끌리는 소리가 요란했다. 현관 쪽으로 몸을 튼 남편이 딸을 건너다보았다. 딸이 신발 벗는 중인지 현관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넘어왔다. 주방 안쪽과 현관 사이엔 벽이 있어 나는 딸을 볼 수 없었다. 나는 밥솥에서 밥을 뜨고 있던 참이었다.

   “왔냐?”

   남편이 딸을 향해 말했다. 딸은 “네.” 하고 대답하며 걸어와 식탁 뒤에 섰다. 딸이 나를 바라보며 눈짓으로 인사했다. 딸이 걸친 녹색 점퍼가 흠뻑 젖어 있다. 딸의 점퍼를 비껴간 시선이 베란다에 닿았다. 베란다 너머 하늘이 회색빛으로 잠겨 있다.

   “밖에 비 많이 오나 보네?”

   걱정스런 기색으로 내가 딸에게 물었다.

   “응. 근데 레인 부츠 신고 나가서 발은 하나도 안 젖었어.”

   딸이 배시시 웃으며 답했다.

   “레인 부츠가 뭐냐?”

   남편이 우리를 번갈아 보며 물었다. 딸은 웃음을 터뜨렸다.

   “아빠. 레인 부츠도 몰라요? 장화잖아. 장화.”

   식탁에 한 자리 차지하고 앉은 딸이 남편에게 한 수 가르치듯 말했다. 나는 쥐고 있던 밥그릇을 딸 앞에 놓아 주고 다시 밥솥 앞에 섰다. 

   “장화를 그냥 장화라고 하면 되지 왜 레인 부츠라고 하냐? 나중엔 엄마랑 아빠보고 마미 파파 하겠네. 죄다 영어야.”

   이해 안 된단 말투로 남편이 불평했다. 딸이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내 몫의 밥공기를 들고 식탁으로 돌아왔다. 내 얼굴에도 웃음기가 서려 있었다.

   “그래, 레인 부츠 신고 어디 다녀오는 거냐? 일요일인데…….”

   크게 한 술 떠 넣은 밥을 우물대며 남편이 딸에게 물었다. 

   “아, 문림이 만나고 왔어요. 아빠, 문림이 알잖아요.”

   “문림이?”

   “그, 나랑 어린이집 같이 다닌 친구 있잖아요. 우리 옛날 살던 아파트 옆 동에 문림이 살고……. 아빠 퇴근할 때 어린이집 들러서 나랑 문림이랑 태워 오고 그랬는데, 몇 번.”

   “아……. 머리 꽉 묶고 다니던 그 애 말이냐? 자기 엄마랑 똑같이 생겼던 그 애.”

   “맞아요. 걔 맞아.”

   “어린이집 다닐 때 친구를 아직도 만나냐?”

   “그건 아니고……. 우리 과 선배랑 같이 있다가 옛날 살던 동네 얘기 나왔는데……. 그 선배도 그 동네 살았다잖아요. 물어 보니까 그 선배 동생이 문림이라네? 세상 진짜 좁죠. 오늘 문림이 처음 만난 거예요. 어린이집 졸업하고 처음 보는 거예요. 진짜 하나도 안 변했더라. 어린이집 다닐 때 그대로야.”

   “그러고 보니까 현선이 너 어린이집 다닐 때 노란 장화 신고 다녔잖아. 그거 아빠가 사 온 건데. 기억 안 나냐?”

   남편이 기대에 찬 얼굴로 딸에게 질문했다.

   “기억나요. 발목 쪽에 보라색 꽃 그려진 거.”

   “그래. 너 그거 신을 때마다 엄마랑 아빠랑 얼마나 고생한 줄 아냐?”

   “왜요? 고생을 왜?”

   “니가 보이는 물웅덩이마다 뛰어드는 바람에 우리 옷까지 다 젖으니까 그랬지.”

   “내가요?”

   “그래, 이 녀석아. 사람이 원래 자기 불리한 건 쏙 빼놓고 기억한다. 이해해.”

   고갤 끄덕거리며 말하던 남편이 나를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엄마, 진짜 내가 그랬어? 물웅덩이 보이면 막 달려들고? 아빠 지금 농담하는 거지? 나 점잖은 애였다며?”

   딸이 내게 물어 왔다. 나는 장난스런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남편 말이 사실이었다. 아장아장 걸어 다닐 무렵 딸이 가장 좋아하는 건 물웅덩이였다. 물웅덩이에서 흙탕물 튀길 때마다 딸은 숨넘어갈 듯 깔깔거렸다. 딸이 그럴 때마다 남편은 딸을 멀찍이 바라보며 “딴 건 몰라도 장난기 하나는 나를 빼다 박았네.” 하고 말했었다.

   좀 커서야 차분하고 말수도 적었지만 네다섯 살 때까지 딸은 알아주는 장난꾸러기였다. 

   “아, 농담은 무슨 농담! 아빠 말 진짜라니까. 너 진짜 물웅덩이 보이면 냅다 뛰어들고 그랬어. 그래서 니가 아까 장화 신고 다녀왔다 그러길래……. 아빤 니가 또 온 동네 물웅덩이 다 헤집고 오는 줄 알았다.”

   “아빠! 요즘 그런 사람이 어디 있어요. 다 커서 그러고 다니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봐.”

   “이상하게 볼 건 또 뭐 있냐? 어른은 물웅덩이 들어가서 첨벙거리면 안 되냐?”

   “그럼 장화 더러워져요.”

   웃는 얼굴 절레절레 흔들며 딸이 대답했다.

   “이건 또 뭔 소리냐. 발 대신 더럽힘 당하라고 장화 신는 거 아니냐?”

   “아빠. 요새 장화 얼마나 예쁘게 나오는데요. 흙탕물 묻히고 다니면 안 예뻐. 물론 어떤 사람들은 다 커서도 물웅덩이 들어가서 첨벙거리고 그러겠죠. 근데 난 아니야.”

   쐐기 박듯 말한 딸이 숟가락을 들었다. 대화 상대를 잃어버린 남편은 조금 시무룩해졌다. 

   이게 남편과 딸이 나누는 일상적인 대화 패턴이다. 남편은 항상 딸을 이해하고 싶어 한다. 그런 한편으로 남편은 딸을 거의 이해하지 못한다. 자신과 다른 세대를 살기에 자신과 생각도 감정도 취향도 전부 다른 딸을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다. 딸을 대하는 남편 눈동자엔 ‘니가 내 자식인데 어떻게 나랑 이렇게 다를 수 있냐?’고 쓰여 있었다.

   그래서 남편은 딸에게 항상 왜 그러냐고 물었다. 딸에게 던지는 남편의 물음엔 ‘내가 어릴 땐 안 그랬는데 너는 왜?’ 또는 ‘나는 이런데 너는 왜?’의 뉘앙스가 짙게 묻어 있었다. 딸을 이해하고 싶어 하는 남편의 노력은 항상 거기서 막혀 버렸다. 매번 딸에게 관심 갖고 접근하지만 남편은 딸의 낯선 모습에 반감을 느끼고 딸에게 반박하기 시작한다. 왜 그러냐고. 어째서 그러냐고. 왜 나와 같지 않느냐고.

   다행히 딸은 그런 남편을 나무라지 않았다. 그냥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남편을 상대할 뿐이다. 지금처럼…….

   속 좁은 나와 남편 사이에서 어떻게 이런 자식이 나왔나 싶을 정도로 딸은 언제나 여유롭고 때론 능글맞기까지 하다. 자식은 부모의 부모이기도 하단 말을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친정엄마가 내 손 붙잡고 그 말을 했었다. “내가 니를 낳아 기른 것은 맞다마는 니도 나를 길렀다.”고. 언젠가 나도 딸에게 이 말을 하겠지. 네가 조금 늦게 태어났다 뿐이지 나도 너도 서로 보살피며 같이 자라 온 거라고.    


   저녁 식사를 가장 먼저 마친 건 남편이었다. 남편은 밥그릇과 국그릇을 포개 싱크대 속에 넣으며 “아직 비 오냐?” 하고 물었다. 나와 딸이 동시에 “네.” 하고 대답했다. 

   “물웅덩이 첨벙거리러 갈 사람?”

   남편이 우릴 돌아보며 물었다. 나와 딸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딸이 내게 고갤 끄덕여 보였다. 아빠 말을 따라 주자는 눈빛이었다.

   “근데 아빤 장화 없잖아요.”

   딸이 남편을 돌아보며 물었다.

   “슬리퍼 신고 나가면 돼. 갈 거냐?”

   남편이 딸과 나를 차례로 내려다보며 말했다. 씹던 밥을 마저 삼킨 딸은 빈 밥그릇과 수저를 한데 쥐고 일어섰다.

   “나는 갈 거야. 엄마도 갈 거지?”

   딸이 나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내가 고갤 끄덕이자 남편이 안방으로 들어갔다. 옷을 갈아입으려는 모양이었다.

   “니 아빠 철없다. 니가 이해 좀 해.”

   딸에게 부탁하듯 내가 말했다.

   “아빠 철없어? 그런가?”

   딸이 고갤 갸웃대며 물었다.

   “자기한테 옳은 거 밀어붙여야 직성 풀리는 양반이잖아. 너 장화 신겨서 기어이 물웅덩이 데려가야겠다는 걸…….”

   “그게 뭐 어때.”

   “넌 싫지 않니?”

   “뭐가?”

   “니 아빠 저러는 거.”

   “난 괜찮아. 아빠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들……. 존중해 주고 싶어. 그거 존중한다고 내 생각이 틀린 게 되는 건 아니잖아. 내가 생각하는 것도 옳고 아빠가 생각하는 것도 옳아. 뭐, 가끔 아빠가 나더러 틀렸다고 할 때가 좀 있긴 하지만……. 아빠가 나 틀렸다고 한 대서 내 생각이 틀린 게 되는 것도 아니잖아. 내 생각은 내가 틀렸다고 하기 전까지 틀린 거 아니야. 엄마, 나 그 정도는 알아.”

   딸이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딸을 멀뚱히 바라보았다. 

   “왜 그래? 그렇게 보면 나 뚫어져.”

   딸이 빙긋 웃으며 내게 말했다. 그러더니 딸도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나는 빈 주방에 앉아 안방과 딸 방을 번갈아 보았다. 




소설집 안내 및 문의 : www.parkdabin.modoo.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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