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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이로운 Feb 16. 2017

세월은 명백히 우리 편입니다



   내가 사는 집 쪽으로 내닫고 있던, 지하철 안이었습니다.

   현실감 있는 꿈까지 꿔 가며, 실컷 졸고 있었습니다. 잠결에 어떤 충격을 몸에 느끼고, 문득 깨어났어요. 내가 느낀 충격은 꿈속에서 느낀 충격이었던 모양입니다. 객차 안은 고요했습니다. 부쩍 썰렁해져 있었구요. 가득 모여 있던 사람들이 많이 빠져 나갔고, 내부 공기가 한층 차가워진 듯했습니다. 발끝이 조금 시렸습니다. 집에 얼른 가서, 따뜻한 물로 오래 씻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때, 내 시야로 한 사람이 들어왔습니다. 10대 후반, 아니면 20대 초반쯤 돼 보이는 여자였습니다. 두 명의 일행과 함께, 그녀는 내 맞은편 자리에 앉았습니다. 

   그녀의 오른손에는 투명한 플라스틱 통 하나가 들려 있었습니다. 그 작은 통 안에는 찌그러진 모양의 주황색 물체들이 가득 들어 있었습니다. 그것들은 말린 과일처럼 보였는데, 정확히 무슨 과일을 말린 건지는 짐작하기 어려웠습니다. 망고 같기도 하고, 무화과 같기도 하고.

   “야, 또 먹게?”

   그녀의 일행 중 한 사람이 그녀에게 말했습니다. 뭔가를 뜯어말리고 싶어 하는 사람처럼 말했습니다. 그 말소리에, 나는 고개를 들었습니다. 그녀 쪽을 쳐다보았습니다. 그녀의 입 속에는 이미 말린 과일이 들어 있는 듯했습니다. 그녀는 쉼 없이 입을 오물거리고 있었습니다.

   “이게 얼마나 몸에 좋은데.”

   여전히 입을 바삐 움직이며, 그녀가 중얼거렸습니다. 그녀로부터 시선을 거둔 뒤, 눈을 다시 감으며, 나는 한 가지 궁금증을 곱씹었습니다. 

   말린 채소나 말린 과일이 몸에 좋다는 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어째서 그것들이 몸에 좋다는 건지.  


  



   그 궁금증을 가졌던 게, 한 달쯤 전입니다. 그리고 나는 오늘에서야 그 궁금증을 해소합니다. 인터넷 화면 귀퉁이에서 말린 과일 사진을 봤거든요. ‘맞다. 이것들이 왜 건강에 좋다고 하는지, 궁금해 했었지.’ 하며, 나는 말린 식재료의 영양 정보를 찾아보았습니다.

   먼저, 채소나 과일을 햇볕에 말리면, 비타민 D가 생긴다고 합니다. 식이섬유 함량도 높아지구요. 수분이 빠지면서, 영양소가 농축된다는군요. 

   그런데 ‘영양소가 농축된다.’는 말이, 내게는 좀 애매하게 느껴졌습니다. 그 말을 구체적으로 이해하고 싶었던 나는, 연습장에 과일 두 개를 그려 보았습니다. 

   하나는 생과일로, 나머지 하나는 그것을 말린 과일로.

   나는 이 생과일의 질량이 10이라고 가정해 보았습니다. 이 10의 질량을 구성하는 건, 2만큼의 영양소와 8만큼의 수분입니다. 이때, 이 생과일의 20%가 영양소입니다. 

   그런데 이 생과일을 말려서, 5만큼의 질량으로 만들었어요. 이때, 이 5의 질량을 구성하는 건, 2만큼의 영양소와 3만큼의 수분입니다(과일을 말릴 때, 어떤 영양분들이 더 생긴다고 하니, 최소한 2만큼의 영양소인 것입니다). 과일을 말리면, 수분만 날아가니까요. 이때, 이 말린 과일의 40%가 영양소입니다.

   생과일의 크기는 크고, 말린 과일의 크기는 작습니다. 말린 과일을 하나 먹으면, 적은 양을 먹고도, 그 과일 속에 든 영양소를 그대로(그리고 그보다 더) 섭취할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말린 과일에는 영양소가 농축되어 있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얘기를 이렇게 구구절절 늘어놓은 이유를, 혹시, 짐작하시겠습니까.

   언젠가 당신이 내게 말했었죠. 나중에는 우리가 서로 나누는 대화가 줄어들 거고, 이런저런 상호작용도 줄어들 텐데, 아무래도 그렇게 될 텐데, 그게 조금 두렵다고. 

   당신이 그 말을 하던 당시에, 나는 ‘그런 건 두려워할 일이 아니라는 말’만 했었습니다. 그런 걸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를 마음으로는 아는데, 말로는 명확히 대답 못했습니다. 그러다 오늘, 말린 식재료에 대한 정보들을 찾아보다가, 그 대답을 분명히 깨우쳤습니다. 

   지금부터 그 대답을 하겠습니다.

   우리 관계를 과일이라고 한번 생각해 봐요. 세월 갈수록, 우리가 나누는 대화나 우리 사이의 상호작용은 얼마간 줄어들게 될 것입니다. 과일 속 수분이 날아가는 것처럼요. 하지만, 우리 관계 속에 있는 마음, 우리 관계의 영양분 역할을 하는, 우리의 마음은 줄어들지 않습니다. 세월 따라 증발되지 않습니다. 

   말린 과일을 통해서는, 비교적 적은 양을 먹고도, 그 과일 속에 든 영양소를 고스란히 섭취할 수 있다고 했었죠. 그것처럼,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는 비교적 적은 말과 상호작용을 나누고도, 서로의 마음을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점점 더 그렇게 될 것입니다. 

   이미 그렇게 되어 왔다는 걸, 당신도 알잖아요. 예전에는 우리가 열 마디를 해야 전할 수 있었던 마음을, 이제는 네다섯 마디만으로도 전할 수 있게 되었습니까. 눈빛의 온도와 목소리의 높낮이만으로도, 서로의 의견을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두려워 말아요. 우리 사이에 놓여 있던 갖가지 것들이 암만 줄어든다 해도, 우리 마음까지 줄어드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 마음은, 시절을 관통하면 관통할수록, 부풀어 왔습니다.     


   뒤늦은 내 대답이, 부디 당신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내 소망에 대해 말한 것이 아닙니다. 분명한 사실에 대해 말한 것입니다. 이 사실이 당신에게도 선선히 믿어졌으면 좋겠습니다. 그 믿음이 당신 마음속 두려움을 가만히 흩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아군으로 밝혀진 시간과 당신이 좀 더 편히 지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사이에 세월이 쌓이는 게, 당신에게 다행스런 일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말린 과일에 대해 실컷 떠들고 났더니, 한동안 햇살과 시계를 볼 때마다, 당신 생각에 사로잡힐 것 같군요. 웃게 되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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